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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프하게 드리는 기도 인쇄
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2015.08.19 조회 : 2615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사실 기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기도에 대해 설교합니다. 오늘은 정말 하고 싶은 얘기, 해야 할 얘기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일일이 다 찾아 읽어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여러 번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얘기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 복음서 기자 누가가 한 말입니다. 곧 비유가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란 얘기는 비유에 대한 복음서 기자 누가의 ‘해석’입니다. 누가는 자기가 이해한 비유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서두에서부터 규정했던 겁니다.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못된 재판관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고을에 과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내용이 뭔지는 모르지만 ‘억울한 일’이 있어서 줄곧 재판관을 찾아가서 자기의 권리를 찾아달라고 졸랐다는 겁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모른 척하고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자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안 그러면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과부의 억울한 사정이 불쌍해서도 아니고 정의를 세워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서도 아니고 단순히 자기가 귀찮으니까, 청을 안 들어줬다가는 과부가 계속해서 자기를 귀찮게 만들 테니까 과부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편하자고 들어주겠다는 겁니다. 복음서 기자 누가는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했다고 전합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유에 대한 복음서 기자 누가의 해석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그 해석에 동의하십니까? 저는 본래 예수님의 비유가 말하려는 메시지와 누가가 이해한 메시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재판관을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못된 재판관’이라고 성격 규정했습니다. 만일 비유의 메시지가 누가의 해석처럼 ‘기도’에 관한 것이라면 재판관은 하나님이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못된 재판관’이 하나님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때 우리가 하도 졸라대니까 귀찮아서 들어주실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본래 비유에서 못된 재판관은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비유가 본래는 기도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약자가 자기 권리를 찾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약자가 가진 수단이라고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강자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중간에 포기하면 도무묵이 된다는 거죠. 강자가 귀찮아서라도 청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 누가는 이 비유를 기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도와도 잘 들어맞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도가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했을 거라고 봅니다.

비유가 말하려는 점은 ‘끈질김’입니다. 재판관이 하나님이든 강자든 청원하는 사람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란 겁니다. 하지만 과부가 그토록 끈질기게 청원한 ‘내용’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억울한 일’이라고만 말할 뿐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건 뭐든지 청원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저는 마태복음 6장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가 있다고 봅니다.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여기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남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회당이나 큰 길 모퉁이에서 기도하지 말라는 얘기는 남에게 보이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아니란 겁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이 숨어 계셔야 합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숨어 계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굳이 하나님이 숨어 계실 이유도 없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남들에게 과시하지 않고 조용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에는 여러분 모두 공감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것과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점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얘기에 비하면 별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시고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게 뭔지 다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신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다 아신답니다! 예수님은 그러니까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 하셨지만 사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면 전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요? 아예 기도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는데 뭣 하러 기도를 하는가 말입니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곧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신다면 우린 아예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들어주실 때까지 하나님이 귀찮아 할 정도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누가복음 18장의 비유와는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줍니다.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그 동안 여러분은 기도에 대해 뭘 어떻게 배웠습니까? 기도 많이 해라, 끈질기게 기도해라, 구체적으로 기도해라, 이루어질 줄 믿고 기도해라 등이 여러분이 기도에 대해 배운 것일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은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하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곧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들어왔고 배워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곧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6장에는 바로 기도의 ‘내용’에 대한 얘기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아시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아신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로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흔히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 내가 욕망하는 것을 구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기도란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내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바로 다음에 주기도가 나옵니다. 주기도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곧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터프하게 드리는 기도’입니다. 글자 그대로 우리가 기도를 하되 강하게 하자는 겁니다. 터프하게 기도하자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기도를 구걸하듯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기도를 구걸하듯이 하지 말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자는 겁니다.

갖고 싶은 것을 구하면 비굴해지고 필요한 것을 구하면 당당해진다

성서에는 기도를 당당하게 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은 야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 한다는 것을 알고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이 거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보기에 롯과 그 가족들을 소돔 성 사람들과 함께 멸하시는 것은 정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돔 성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야훼께 청했습니다. 거기서 의인 오십 명을 찾아내면 그곳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바꾸시겠냐고 말입니다. 야훼께서는 그렇게 하시겠다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당당하게 한 번 더 청합니다. 의인이 사십 명 있어도 계획을 바꾸시겠냐고 말입니다. 이에 야훼께서 동의하시자 그는 숫자를 점점 줄여 열 명까지 낮췄지요. 물론 알다시피 소돔 성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야훼와 당당히 맞서서 기죽지 않고 기도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구걸하지 않고 당당히 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의 기도 내용이 정당했기 때문입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일이 야훼의 원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야훼께 원칙을 지키라고 청했던 겁니다. 기도의 ‘내용’이 야훼 스스로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야훼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욥은 흠이 없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흠이 전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는 야훼 자신도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합니다. 원인은 천상에서 야훼와 사탄이 벌인 내기 때문이지만 욥이 그걸 알 리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게 ‘이유 없는’ 고통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는 야훼께 당당히 따졌습니다. 자기가 왜 이런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냐고 말입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당당했습니다. 분명히 그럴만한 죄를 지었을 테니 얼른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닦달하는 친구들의 주장에도 그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법정으로 끌어내려 합니다. 법정에 나란히 서서 잘잘못을 따져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피고인 동시에 재판관이라는 문제가 있어서 망설였지만 말입니다. 이런 욥이 여러분 눈에는 어떻습니까? 당당하지 멋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제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를 아버지의 뜻이 무조건 ‘순종’하는 기도라고 말입니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순종을 가리키는 것, 맞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당당하게 “이젠 제 할 일을 다 했으니 아버지의 차례입니다. 이제는 아버지께서 나서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로 가셔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터이니 그 사건을 통해 아버지의 구원의 뜻을 이루시려면 이젠 직접 나서시라는 뜻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욕망을 채우려 한다면 비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겸손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겸손은 그 반대급부로 뭔가를 얻으려는 목적이 없을 때 자기를 낮추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에게 아부나 하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행위를 해서 하나님에게 뭔가를 얻어내려 한다면 그런 기도가 얼마나 비굴해지겠습니까. 하지만 기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 곧 정의와 평화, 인권과 자비와 화해 등을 구하는 거라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기도를 당당하게 드릴 수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종교를 통해서 물질적인 복을 얻어서 누리려는 기복신앙을 비판하면서 기도에 대해서는 기복신앙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해왔습니다. 안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기도의 내용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갖고 싶은 것,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자는 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가 마음과 뜻을 합해서 함께 이루어나갈 것을 소망하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이니 말입니다.
 
곽건용 목사
KCMUSA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함께 나누세요
2017-11-20
09:19:21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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