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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 한국 영구귀국 앞둔 진보신학자 홍정수 박사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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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크리스천 위클리| 작성일2021-06-14 | 조회조회수 : 6,0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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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리교서 파문 당한 후 30여년 미국생활 …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솔직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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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으로 영국귀국을 앞둔 홍정수 박사

     

    ▷ 그 동안 오랜 미국 생활을 요약 정리해 주시겠는가? 언제 미국 오셔서 어떤 목회 활동과 연구 활동 등을 하셨는지…


    홍 박사-예수 믿으면 뭐가 좋아요? 나의 일생을 좌우한 질문이다. 내 친구, 이웃들은 예수 모르고도 잘 살아가는데, 나는 왜 외국인 메시야 예수를 좇아가는가? 기독교는 과연 사람들에게 무슨 유익을 준단 말인가? 지금 우리 주변의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월등하게 유리, 유익한 지경에서 산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롬 3:1의 바울을 괴롭힌 질문과 일맥상통?)


    이 질문을 풀기 위하여, 신학교에 들어갔고, 이 질문을 풀기 위하여 미국 유학을 했고, 이 질문을 함께 풀고자 (지금의) 한국기독교연구소를 1988년에 세웠다. 아직 감신대 교수 시절, 완전 사비(私費)를 들여서. 그러다가 종교재판이라는 사건을 만났다. 그 사건은 외부, 혹은 기록 역사가들이 알고 있는 그런 성격의 사건(신학 노선 싸움)이 전혀 아니다. 그냥 힘꽤나 쓰긴 하지만 내면의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일부 소수의 불쌍한 사람들의 가면극에 다중이 놀아난 것일 뿐이다. 사용하기는 싫지만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감히 사용한다면, “앞서가시는 하느님”께서 내가 젊어서 품었던 질문의 계속적 탐구의 길로 다시 내몰아 가신 것이었다. 한국을 떠나오면서, “예수 믿으면 뭐가 좋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를 계속 그리고 편안하게 씨름하게 되었다.


    1994년 5월 마지막 날, “잠시 피신하자”는 맘으로 시작한 난민 생활, 벌써 만 27년이 지났다. 그리고 조국으로 이제 귀향한다. 처음 품었던 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찾았지만, 사람들의 코드(취향)가 달라졌다는 걸(달라진 게 실은 아니다. 본래 그러하다!) 이제 비로소 깨달았다. 만물, 만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없고, 일시적 기능(효능)에 대한 흥미만 가득하다는 현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를 돌아보면서, “하느님”께서는 늘 동행하고 계셨음을 이 시간 고백한다.


    잠시 머물다 가는 소풍인 줄 알고, 여장을 클레어몬트신학교 교정 아파트에다 풀었다. 그리고 공부를 다시 신나게 했다.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교실과 같은 풍경일 것이라고 나는 늘 믿어왔다. 교실에는 권위와 지위의 폭력,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다수의 폭력이 전혀 힘쓰지 못하는 유일 공간이기 때문이다. 클레어몬트에서는 나에게 3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 예수-세미나 학파들이(클레어몬트 신학파들은 혐오하지만) 예수전 연구에 대한 책들을 미친 듯이 발간해내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미 떠나온 다음) 한국기독교연구소(김준우 소장, 한인철 이사장)는 역시 미친 듯이 예수 연구 서적들을 번역해 냈다. 언젠가는 빛을 볼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장사가 전혀 안 될 줄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예수 학자들의 자료 발간을 보고, 우리 셋이 “유레카(나는 발견하였다)”를 함께 외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둘째, 미국 유대인 3세 신학자 라일리 교수 강의를 두 개나 들었고, 페이퍼도 제출하였다. 기독교 초기 공동체의 신앙을 담은 토마복음서, 그리고 부활 신앙의 근원에 대한 종교사적 연구였다. 처음 교회의 신앙에는 십자가도 부활도 자리기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계시록의 천국에는 “바다”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속사정, 그리고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 기둥들의 신학을 저주하면서도, 그들과 꼭같은 조건의 부활 예수를 만났다고 고집하는 정치적 사연, 외경 속의 부활 자료들, 자라투스트라의 이야기 등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조직신학밖에 모르는 장님이 빛을 보게 되는 큰 사건이었다(하느님, 감사합니다).


    셋째, 부활은, 한국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새번역한다면, “개벽(開闢)”이다라는 논문을 존 캅 선생 앞에서 읽었다. 부활은 개인의 사후 세계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역사의 암울, 곧 신의 부재(不在), 신 정의의 실종 상황 속에 어떻게 신앙을 지속할 것인가 라는 심각한 물음에 주는 대답, 따라서 이조 말 한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용어, 개벽을 사용하는 게 훨씬 더 적절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캅 선생은 “과정철학 용어로 풀어쓰면 더 좋겠다”는 주문을 남기셨다. 이로써 “교실에서 신학-하기”는 마쳤다. 부활에 관한 한 어느 학자 못지않게 폭넓게 자료를 읽었고, 그 덕에 미래의 기독교가 부활 신앙을 말되는 말로 계승한다면 어떤 길로 가야 할지를 나는 감히 점칠 수 있게 되었다.


    ▷ 이민목회의 시작과 배경, 그리고 이민 목회는 어렵다고 하는데 그 경험을 말해 달라


    홍박사-목회자, 목사… 사실 나의 관심 밖의 일이다. 신학을 배우러 신학교 갔지,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 간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로교회처럼, 안수 후보자들이 각자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고민, 결단한 후에 안수를 받는 길을 갔더라면, 내가 목사 안수를 받았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동향 남자 친구들이 때가 되면 우루루 함께 군대 가듯이, 감리교회는 졸업 동기생들이 연급이 되면 우루루 함께 안수를 받게 돼 있었다. 게다가 부교역자도 안수받을 기회가 있었던 탓에 그냥 안수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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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구귀국 소식을 듣고 옛한아름교회 성도들을 대표하여 박승중 장로가 감사패를 전달했다 


    파문을 당하고, 미국으로 피난 온 지 한 달 후(94년 7월 1일), 후배 주선으로 “성경공부 (신학)교실”이 열렸다. 그것이 그냥 한아름 “교회”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아름교회라는 이름의 공동체는 지난달, 5월 16일, ‘아름다운 공원(Buena Park)’이라는 도시의 동네 공원에서 남은 교우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처음 모임과 마지막 모임에 참여한 가족 중 한 분인 정신과 의사가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해 주었다: “거짓말, 제일 안 하는 목사님이셨습니다.”


    뜻밖의 사건이라는 뜻에서 나의 이민목회는 사실상 사생아처럼 시작되었다. “교회”라는 이름, “축도”라는 몸짓은 나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이민목회는 그렇게(안수처럼 나의 심각한 결심 없이) 출발하였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유아세례 요청!


    나는 도서관을 찾아갔다. 가톨릭 교회 법전을 뒤적였다. 파문당한 자가 집전하는 성례도 효력이 있는가? 근거는? 어른들끼리야 서로 동의한다면 무엇이든 용납되겠지만. 교회 법전은 이렇게 일러 주었다. 파문은 행정적 절차이다. 교회 행정은 그 교회(교단) 안에서만 유효하다. 하느님과는 상관없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행동에 간섭받지 않으신다. 아멘! 그 후, 기회 있을 때마다 한아름교회는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그들은 자라서 대학생들, 성인들이 되었다.


    이민목회는 어렵다!? 하하하… 목회가 뭔지 전혀 관심 없던 나, 목회자?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나에게 있어 목회란 그냥 신학교실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45분 공부, 45분 예배, 45분 친교로 주일 모임이 진행되었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프로그램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나 모임 장소를 몇 번 씩 이동해야 했고, 그 과정 속에서 교우들의 성향과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나는 몰랐다. 결정적인 변화는 비교적 안정된 한인들이 살던 곳에서 LA 한인타운으로 이전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신학공부? 그것은 사치였다. 신분 해결, 가정불화, 상처받은 존심 회복의 욕구, 이 3가지 일에 주력하였던 것 같다.


    교회는 작았지만, 최선을 다해 신분해결에 도움을 주었다. “목사님, 정의롭게 살자는 줄 알았는데 .... 영주권을 해 줘요?” 그 소식이 들린 다음 날, “사람 살리기 위하여 안식일을 공개적으로 범한 예수님을 알기나 하시나요? 앞으로 모든 영주권 서류는 저 혼자 싸인합니다. 당신들은 법적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모른다’고만 대답하십시오.” 이로서 사태종결!


    처음에는, 한국에서처럼, 젊은 층을 대상으로 신앙운동을 전개하고 싶었다. 교우들 중 대학생 이상 자녀들 몇몇을 불러, 대화를 해 봤다. 그리고는 즉시 포기하였다. 똑똑한(한국어 간신히 떠듬거리는) 그들은 “기독교인 싫어요. ‘책임’이라는 단어를 모릅니다.” 누구를 원망하랴. 띵~! 한대 얻어맞았다. 지금도 아프다. 미해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서 책임감을 발견할 수 있는가?


    이민목회의 아픔? 처음에는 몰랐다. 갑자기 불시착한 나, 어케어케 목회의 길에 접어든 나, 그냥 신학교실 운영하듯이 주일을 보내던 나,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한인들, 특히 한인타운의 “한인들은 저마다 숨겨진 상처”를 안고 산다는 걸 알았다. 한동안 밤에 꿈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정신과 의사인 교우가, 이 증상을 두고, “꿈을 꾸지 않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하여 꿈조차 억압하며 지내는 겁니다”라고 일러주었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한인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헨리 나웬의 책명, “상처받은 치유자”? 그건 거짓말이다. 우리는 서로 자기만 아픈 줄 알고 살아간다. 위로하기 보다는 위로 받으러 교회 나온다. 노래 잘 못하는 사람들이 성가대원이 되고 싶어 한다. 얼굴 빛내려고. 나중에는 쏠로(독창) 시켜달라고 한다. 더 돋보이려고. 결국 성가대는 갈등의 증폭 무대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목회자라는 나, 깊은 상처를 감추고(덮고) 살아가는 나, 남(교우)의 상처를 어떻게 어루만져 줄 수 있다는 것인가? 교회에서 치유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목사 탓이 아니라, 뭔가 다른 요소의 작용 탓이라 이해해야 옳다. 적어도 나의 이민목회는 그러했다고 고백한다.


    ▷한국 귀국을 결정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회고할 수 있다면?


    홍박사- 어느날 귀부인이 교회를 방문하였다. “목사님, 선교 활동을 하시면 어때요? 제가 큰손들을 좀 알거든요?” 아마 나의 신학이 말된다고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선교 활동이 없이는 교회 경영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교회들마다 선교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하느님 돈, 떼먹고 잘 사는 사람 있겠어요? 우리는 중단 없이 전진합니다. 아멘.” 필리핀 선교에 돈을 보내던 교회를 장로님들을 대동하고 목사님이 방문했다. 그랬더니, 그 선교사는 간판을 바꿔가면서 선교비를 받는 모금 운동의 천재였을 뿐이었다. 그것을 목격하고도 대안적인 선교 활동을 찾아내지 못한 그 목사는 계속 그 길을 가야 했다.


    나는 (조직)신학 공부밖에는 관심이 없었다. 선교활동을 벌이고, 큰 손들의 성금이 들어오고, 교회가 “성장”하면 ... 나는 신학교실 운영자가 아니라 교회라는 기업의 경영자가 될 게 아닌가? 내가 아끼는 후배, 제자 목회자가 있다. 교인 300명까지는 멀쩡한 양식의 사람이었는데, 교인이 갑자기 (수평 이동)5배로 늘어나면서, “딴 사람”이 돼버렸다 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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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교인들의 환송회가 열린 부에나 팍에서 다시 만난 정신과의사 조만철, 조혜련 박사 부부. 
    이들은 교회를 시작할때도 함께 했고 송별의 자리에도 함께 했다 


    이민목회 사역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 한 가지를 든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위에서 이미 말한 부활 신학 공부 마무리 외에)? 굳이 말한다면, 단연코 옆 동네 신학 훔쳐보기이다. 지금 지구촌 팬데믹 시절에 더욱 빛을 발휘하는, 오늘날 유대인들의 신앙을 배우게 된 것이다. 히틀러 치하의 수용소 생활 흔적으로 팔뚝에는 아직도 푸른 문신이 남아 있는 부부를 만나 대화하는 일을 계기로, 기회 있을 적마다 서점에 들러, 미국 유대인 랍비들의 책을 구입, 읽었다. 이것은 여기 한인타운 옆동네에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덕이 컸다.


    모세의 하느님, 기적의 지팡이, 그런 건 히틀러 치하 유대인들의 체험에는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 유대인에게 물었다. “(하느님 없는데) 당신(들)은 하느님을, 왜 어떻게 아직 믿는다는 겁니까?” ... 책상 위에 있던 나의 성경책을 가리면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 유대인은 말했다. “저 책 속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 하느님 밖에 다른 하느님 없어요, 싫으면 안 믿으면 되고요, 하느님 믿고 싶으면, 저 책 속에 있는 그 가르침대로 살면 됩니다,” 뭐가 더 필요한가?


    그 후 묘한 기회가 생겨, 나는 갈릴리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2004년). 미국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진짜로 보장돼 있다. 즉 국가는 종교와 종교 지도자 교육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는다(한국과는 크게 다르다). 처음에는 평신도들에게 신학 공부 기회를 주려는 목적에서 시작하였는데, 아주 우연하게도 한국 장로교회(통합측) 재야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팀을 이루어, 재교육(신학박사 과정)하는 과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나의 신앙의 출발점은 강원도 철암장로교회(통합측)이었는데, 이제 그 빚을 갚는 셈이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논문 작성하는 학위 후보자들에게 한 가지를 요구한다: 출발점도 귀결점도 갈릴리 예수여야 한다; 예수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자유. 그러다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목회자 부인이다. 그 여성도 이미 신학 기초과정을 마쳤다. 그런데 질문을 한다. “예수? 왜 필요해요? 하느님께 기도하고, 기도 응답받고 .... 뭐가 더 필요해요?” 물론 죄 용서에 있어서 예수의 보혈 공로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목회 현장이라는 맥락에서 오고간 이야기이다.


    그제서야 나는 목회자의 현장 감각을 확실히 파악했다. 구약과 신약에 두루 주인공 역할을 하는 하느님, 신앙과 목회의 중심은 하느님이시다. 구약은 예언이요 신약은 그 성취이다. 끝! 즉 예수의 삶은 필요가, 자리가 없다. 나에게는 그토록 중요한 사람 예수의 이야기가 현재 우리 기독교 신앙, 신학 속에는 자리(빈 방)가 없다는 게 새삼 놀랍다.


    그러나 히틀러를 경험한 유대인들은, 노골적으로는 아니지만, 결국 예수의 길을 가는 신앙을 발견하고 말았다. 지금 지구촌은 코로나가 지배하고 있다. 어찌 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최강의 힘은, 권력이든 돈이든 자연재해든 뭔가 악마 쪽에 있다. 그리고 그 악마 세상에서, 악마 숭배자가 아니라, 여전히 사람으로 사는 길을 가는 게 신앙인의 소명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하느님도 예수님 자신도 “연약하다”고 시인한 바 있다. 히틀러를 통하여 유대인들도 이것을 이제는 안다. 지구촌 기독교인들도 이제 이것을 알아차릴 때가 아닐까? 예수님, 예수님의 하느님은 최강의 힘이 아니다. 그러나 악마적 세상에서도 사람으로 사는 지혜를 보여주는 생명 길이다. 그런데 왜 목사들은 예수님(갈릴리 사람)을 알려고도 하지 않을까? 어찌 보면 예수 없는 기독교는 서구 신학자들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서구의 주류 신학자들(신학하기는 그냥 직업이다!)이 먼저, 근본적으로 “예수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고백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신이 아니라 사람 예수님이 신앙, 삶의 길잡이였다. (많은 목회자들이 모태신앙인이라 예수 무관심의 고질병을 고치기란 쉽지가 않다.)


    ▷신학자로서 앞으로 미주 한인교회의 미래에 관해 예측하는 점이 있다면?


    홍 박사- 두 가지를 잠시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첫째, 한국에서도 이민사회에서도 지금 우리 청년들이 교회 밖에서 놀고 있다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왜 청년들은 교회 밖에서 놀고 있는가?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건 미국에서건 공교육을 받은 신세대는 신화시대의 미신적 이야기를 (개그로 즐길 수는 있어도) 수용하지도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최근 Christian Century 잡지(2021년 4월 26일 자)는 카나다 퀘벡이라는 전통적 가톨릭 지역이 철저히 세속화된 현실을 주목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최대의 개신교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남침례교회는, “세례냐 침례냐?” 하는 하나의 주춧돌 위에 세워진 교회인데, 이제는 그 존재 이유가 실종돼 빠른 속도로 퇴락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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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가 하면, 최근 미국의 한 루터란 여성 목사가 목회를 사임하고, 복지 센터로 일자리로 옮기면서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다. 그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 “사랑과 자비가 넘쳐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 주는 전능자 하느님”과 걸맞지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 전통적 기독교의 이야기가 지적 설득력이 없다는 점이 갈수록 극명해 지고 있다. 히틀러 덕(?)에 거듭난 유대교처럼, 기독교가 갈릴리 사람 예수를 재발견하게 된다면, 희망은 있다. 그러나 모세와 홍해의 하느님 이야기로는 신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을 낚지는 못할 것이다.


    교권주의자들,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말되는 기독교 메시지의 설정’이라는 이 작업이 심각한 도전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기독교 자체가 위기에 처한 것은 전혀 아니라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코로나 사태를 보라. 생존을 위하여 숨죽이고 살기 1년!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지구촌 곳곳이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어보라. 즉 잔치를 벌이는 예수, 생명을 돌보는 재미, 보람, 그리고 명분으로 기쁘게 살았던 사람 예수, 그 예수님의 길을(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알고 맛보기만 하면, 누구나 그의 양생(養生) 춤의 대열에 합세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근본주의 교회에는 청년들이 아직도 많은가?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나는 고집한다. 1925년, 미국에서, 한 석유 회사(76 Gas)의 자본으로 피어난 문자주의, 미국에만 있는 이 기현상 근본주의 교회들의 강고한 힘은 지금 미국의 백인들이 이상한 몸짓으로 단결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쫓기는 자들의 내면적 불안증의 외부적 폭발! 참 강자는 여유가 있다. 관용을 베풀 수 있다. 창의적 생각들을 환영한다. 융통성 있다. 얼마 전 미국 청년의 한 트위트를 읽었다: “내 친구 9명이 목회자입니다. 최근 그들은 모두 직장을 바꾸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의 인간 혐오에 혐오를 느껴서입니다.”


    속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외피 껍질을 두껍게 만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불안에 쫓기는 청년들이 “생각을 멈추게 하는” 근본주의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하여, 그것이 미국 사회의 청년들 미래의 대세가 될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역사 감각의 부재라 할 수 있다.


    우리 교회에 한 여자 청년이 있었다. 간호사. 그런데 남자를 만날 수 없었다. 우리 교회는 알잖아요. 작은 교회. 그래서 청년 많기로 소문난 한 침례교회를 소개했다. 얼마 후, 돌아와서 하는 말, “청년들은 많은데, 좀 이상해요.”


    둘째, 한국 뉴스 매체 하나가 얼마 전 크게 다룬 바 있다. 교회를 등지는 신도들, 직업을 잃는 목사들. 나는 잘된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복음서의 예수께서 사람 낚는 어부라는 신종 직업을 창출하긴 하셨지만, 바울 사도의 방식을 나는 존중한다. 즉 먹거리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고, 목회라는 하늘 소명에는 목숨 바쳐 헌신한다.


    이민목회 도중에 잠시 미국 제자회에 속했던 적이 있었다. 감리교회와 정신적 출발점을 같은 데(존 로크) 두고 있는 이 교단은 “다중직(多重職) 목회자”를 처음부터 인정하고 있었다(교단 창립자들이 세속 부자들!). 나는 이 그룹을 통하여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바울 사도의 목회 노선 의미를 깊이 깨달았다. “목사님들, 받들어야 할 소명이 있나요? 남을 해치는 일이 아니라면, 또 가족들이 부끄러워하는 일이 아니라면, 속세의 일을 하면서 목회하셔도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니지만(바울 사도도 이 점은 인정한다!). 바울 사도가 보여준 뜻깊은 모범이 바로 다중직 목회이다. 코로나 계절에 많은 교단들이 이 길을 불가피하게 수용할 모양이다. 선하신 우리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한 것”을 이끌어 내신다고 고백하고 싶다.


    “목사님들, 당신이 속한 교단이 다중직 목회를 인정해 주지 않나요? 교단을 세우십시오. 아무도 방해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치하에서 우리가 살긴 하지만, 목사가 돈 때문에 치사해지지 말아야 비로소 주님을 받들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는 점이다.


    ▷미국을 떠나면서 후배 목사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홍 박사- 북한에서는 처음에 기독교 목사를 가리켜 “골(뇌) 돌리는 기수”라 불렀다 한다. 즉 사람들을 세뇌시킨다는 말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당의 세뇌를 당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터이지만, 그들은 기독교 목사들을 가리켜 오히려 거짓을 일삼는, 신용불량자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후배 목사들에게 해 주고 있는 말? 이미 고백한 바 있듯이, 전통적인 목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목회에 도움 될 말”은 전혀 알지 못한다. 단지 한인타운에 오랫동안 살면서, 이 동네에서는 “목사”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남겨두고 싶다. 한인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목사들이 있을 거라고 조금은 믿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이 초기에 생각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제자(감리교 목회자) 부인이 이민 초기에 겪은 실제 이야기가 있다. 옛날 가주마켓 안의 작은 선물가게에서, 대 낮에 정장을 하고, 여성 란제리를 고르고 있는 잘 생긴 남성이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가게를 지키던 그 부인은, “혹시 목사님이세요?”하고 다정히 말을 건넸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뭐요? 내가 도둑놈으로 보여요?”라고 그 사람이 획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날 밤, 이민 초기의 그 젊은 목사 부인은 한없이 흐느꼈다고 한다. 뭐가 잘못된 걸까?


    한인타운에 살면서, 우리 교인 아닌 사람들과 친교를 나눌 기회를 갖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사진 공부를 시켜 준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단기 교육 과정을 마친 후,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 기회가 돌아왔다: “예, 저는 한인타운에 살고 있는 홍정수 목사입니다.” 회원들의 자세가 갑자기 달라졌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는 자세에서, 송충이를 보았을 때 취하는 은근슬쩍 거리두기 자세! 나는 왜 그리 하는지 익히 체험한 후라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런 거리두기 자세는,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말없이 갖가지 잔심부름을 하는 나의 꼴을 본 후에야 달라졌다. 그 후 우린 서로 친구가 되었다.


    목사? 한인타운에서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일반 목사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을 터이니 걱정할 바 아니지만, 목사들이 신용불량자 취급을 더 이상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가족 연명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건물 일부 공간을 빌려, 주일 예배를 드리는 수많은 작은 교회 목사들, 우리들에게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길은 없을까?


    첫째, 예수의 제자가 되라. 둘째, 예수처럼, 말이 아니라 & 예외자가 아니라, 모범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인도하라.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한인타운 노르만디 절에서도, 일본 오사카의 한 절에서도 부처님은 괄시를 당한다. 한인타운 반야사 주지승과 친교 할 기회가 있어 물었다. 그리고는 알았다. 법당 정면에 있는 3불상, 그 중에 석가 상은 없었다. “왜 이 법당에는 부처님 상이 없어요?” 인기 가득한 3불상은 있는데. “사업에 도움이 안 돼 그렇지요?” 내가 목사인 줄 아는 그 주지승은 그냥 빙그레 웃었다. “비워라, 버려라!”를 설하시던 부처님 상, 법당 안에 아예 없다. 그러면 본질에서 이탈한 그 사찰의 주지승, 그는 어디서 자신의 인간적 품위를 얻을까? 그 주지승은 “유머 3단, 아무개”라는 명함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자기 전공은 웃음을 가르치는 전도사란다. “웃음은 암도 치료합니다.” 자기 메시지의 압축 파일을 들려주었다.


    목사님들, 당신들의 전문적 직능은 무엇인가요? 헌금 들고 찾아와 주는 신도들에게 내가 줄 유익, 혜택은 무엇인가? 이 땅, 은근 서러운 이민자의 땅에서 나의 고객들이 맛볼 수 있는 혜택 말이다. 사실 나는 샌프란시스코 장로회 신학대학 한국어 프로그램에서 만나는 장로교 목회자들에게 10년 이상 꾸준히 같은 질문을 물어 봤다. 돌아오는 답변은 “예수 천당”이 전부였다. 즉 우리 이민자들의 현실적 삶 속에 심어줄 유용한 가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보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목사님께서 교회사적으로 기독교의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계시는가?


    홍 박사- 멸망의 폭포를 향해 흐르는 강물을 계속 떠내려가는 조각배와 같다. 밖에서는 이슬람이 지금 우리들을 공격해 오고 있고, 안에서는 과학(합리적 사고-생활방식)이 우리들의 뿌리를 위협하고 있다.


    어떤 유튜버가 “왜 불교는 본고장 인도(다신론, 계급, 신분사회)에서 결국 사라지고 말았는가?” 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다룬 것을 최근 보았다. 계급사회에서 평등을 가르친 불교는 한때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평등 “사상” 만이 아니라, “평등 실천”을 가르치고 이룩해 나가는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불교는 본고장에서 그 사회적 기능을 잃었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역사의 비밀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배울 게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톨릭은 지금 코로나 덕에 핵심 신학인 “미사-성체-성례” 신학을 새로 수립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는 기사를 읽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체화된 미사 때의 성체(聖體)를 받지 않으면, 죄 용서가 안 된다는 전통 신학은 코로나가 공개적으로 죽였기 때문이다.


    세계 개신교 상황은 어떤가? 생각 있는 (조직)신학자들은 이미 기독교를 떠났고, 남아 있는 신학자들은 그냥 직업꾼들일 뿐이다. 과거의 교리를 변호하는 것으로 연명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종종 과학을 적으로 오인, 그 발견들을 억압해 왔다. 지금 코로나의 지구촌 습격으로 인하여 해묵은 그 전쟁이 재연되고 있다.


    개신교 지도자들, 특히 신학자들이 이 전쟁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게 나를 안타깝게 한다. 혹 알아차린다 할지라도, 말하면 교권주의자들에 의하여 죽게 되니, 누가 감히 말하랴 마는.


    오늘날 교계 뉴스들을 보면, 미국이고 한국이고, 교회가 당면한 극히 주변적인 일들만 걱정하고 있다. 지금 유럽 사회의 현재 기독교 인구는 5% 미만이라 한다. 말 되지 않는 미신적 기독교 이야기(그것이 신학이다)를 완전 재정비, 새로운 기독교 이야기를 창작해 내지 못한다면, 미국과 한국 사회 속의 기독교 세력의 운명도 인도의 불교처럼 될 게 뻔하다.


    그럼 대안이 있는가? 사람 예수 이야기, 기독교의 고유한 자산, 그것이다. “Q복음서,” “도마복음서”는 그 확실한 증거이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제도권” 기독교의 두 초석 없이도, 아름다운 예수 신앙이 얼마든지 가능한 적이 이미 있었다 하지 않는가! 나만의 망상이 절대 아니다.


    미국 제자회에 한아름교회가 속해 있었을 때의 일이다. 미국 사람들은 소수인종을 하나씩 중요한 자리에 끼워주는 이상한 정치적 모양새를 곧잘 유지한다. 그 덕에 제자회 신학교 이사직 역할을 일년 담당한 적 있다. 도서관에 가면, 신학교 운영 이사진들만 주로 보는 잡지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아마 이미 15년쯤 전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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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정수 박사가 미국에서 유일하게 목회했던 교회는 한아름교회였다
     


    그 잡지에 의하면, 미국 신학교들은 지금 몰락의 길을 가고 있다, 그리고 회생의 가망성이 없는데, 그 주된 이유는, 기독교 안에는 힘들게 살아 남기 보다는 화려하게 순교를 선택하는 길을 찬양해온 정서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 목사, 신학자들 중에는 아마 신학교육의 역사를 공부한 유일한 사람이 나 홍정수 라고 나는 착각한다. 오늘날 신학교들의 이런 몰락의 이유와 대안을 나는 알고 있다. 존 캅 선생도 알고 있었고, 실험도 했다. 그러나 협조를 얻지 못하였고, 그 실험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무슨 희망이 있다고?


    17세기 독일에서 한 신학교가 새롭게 탄생했다. 이름하여 할레대학이다. 이 학교에서부터 경건주의라는 새로운 사조가 당시 개신교회의 교리주의를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진젠돌프라는 거부의 투자가 큰 역할을 하였지만. 따라서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의 개신교는 진젠돌프와 할레대학에다 정신적으로 크게 빚을 지고 있다. 이제 새로운 할레대학의 탄생할 시간이다. 기도할 시간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계신가?


    홍 박사-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께서 하신다(잠16:1)”는 말이 있다. 또 무슨 계획? 할 말은 단지 하나, 내가 그 동안 배우고 익힌 건 단 한 가지, 기독교(색깔을 잃지 않은) 조직신학(지금 오늘을 위한 복음의 압축파일) 만들기. 이민목회 기간이 27년, 처음 유학 시절 시기가 4년, 합산하면, 한국 기독교의 출산지인 미국에서 기독교 메시지 만들기 공부를 한 시간이 이미 30년이 넘었다. 그 동안 오직 한 가지만 공부했다. 기독교 핵심이 무엇인지 혹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밤을 새며 기꺼이 나의 공부를 나눌 것이지만, 사회적 적응능력이 크게 모자라는 이 촌놈은 여전히 사람이 무서우니, 동해의 파도와 대관령 산새들과 눈 마주치며 시간 보내려 한다.


    ▷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홍 박사 - 열등감은 어떻게 치료되는가? 세상 게임에서 늘 뒤 쳐지는 나, 그리고 많은 목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본주의 귀신 놀이, 인기 게임의 귀신 놀이에서 우리는 곧잘 “2등”을 한다(3등은 행복하다 한다, 간신히 상을 받게 되어). 그래서 우리는 “1등이 되지 못한 나는 못난 이”라 여긴다.


    그런 우리가 아직 & 여전히 예수님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오늘도 귀신들린 기독교인, 특히 목사님들이 그렇게 묻는다. 실천을 하는지 않는지가 겉으로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제4계명 준수를 공개적으로 & 반복적으로 거부하면서도, 가능한 모든 주변 사람들과 꾸준히 공개 파티(잔치)를 즐겼던 예수님, 그 예수님의 마음과 몸을 따르면, 지금도 우리는 “내 안에 기쁨이 가득하다”는 말을 솔직히 할 수가 있게 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내 삶의 스타일과 명분이 흔들거리는 이빨 같은 나의 자존심을 든든히 받쳐주게 되기 때문이다. 갈릴리 사람 예수,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 바울이 경험한 그 더 없는 기쁨의 경지를 맛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빼앗기고도 결국 “죽어도 좋아!”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이 존심의 회복이요 구원의 경지에 이른 삶의 징표 아닌가!


    그러면 “한아름”이란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신학 공부라는 긴 여정을 달려왔다. 그리고 해방신학을 만나면서, 사회-제도, 법의 혁명 없이는 예수님, 그리고 바울 사도가 으뜸으로 귀히 여겼던 그 힘없는 자들에게는 웃음꽃이 피어날 수 없음을 배웠다. 그래서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열심히 달려가는 소위 운동권 신학을 존중한다. 그러나 미국의 신학교실에서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은 지금 한국의 광화문 경험과 아주 완전히 동질적이다.


    정의와 평화를 구호로 내거는 사람들은 자기들 상대편 사람들을 가차 없이 학살한다. 정의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즉 우리의 정의, 우리의 평화는 우리 밖의 사람들에게는 탄식이요 죽음일 뿐이다. 지구촌 온 주민들이, 아주 위태롭고 힘들긴 하지만, 한 데 어울어짐(=한아름=서로 다른 가치들의 어울어짐)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지구 문명은 미래가 없다는, 철학적 신념의 이름이다. 정의와 평화만으로는 희망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세리(매국노, 외세파)와 죄인(범법자, 불량자)의 친구”였던 예수가 나는 좋다.


    [내용가운데 일부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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