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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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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31]





    < 1 >


    ‘성령’, 곧 ‘거룩한’(holy, 히브리어는 qodes, 그리스어로는 hagios)이라는 단어와 ‘영’(spirit, 히브리어는 ruah, 그리스어로는 pneuma)이라는 두 단어가 결합된 ‘성령’은 일반적인 그리스 문학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고, 구약성경에서는 역사적으로 바빌로니아 포로기 이후의 문헌으로 알려진 이사야서 63장 10절과 11절, 그리고 시편 51,13절에만 등장합니다.


    ‘성령’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사용된 곳은 오직 신약성경뿐인데, 그 가운데 특히 누가복음서와 랍비문헌들입니다. 신약성경 이전 시대의 문헌 가운데는 쿰란 공동체의 사본들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성령은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성령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는 무엇인가?’를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 2 >


    신약성경의 초기 문서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의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에 ‘성령’(푸뉴마 하기온)은 13번 등장하고, ‘영’(프뉴마)은 113번 나옵니다. 바울의 서신 외의 복음서들 가운데에서 성령이 등장하는 곳은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복음입니다.


    누가복음서과 사도행전에 성령이 빈번하게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영’의 사용이 절대적으로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영’과 비교할 때, ‘성령’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05년 엘비라 공의회에서 오순절을 부활절이 지난 일곱 번째 주일에 교회의 출발과 성령강림을(행 2장) 기념하는 세 번째 중요한 교회의 축제로 인정했고, 381년에 성령론이 교리로 확정되면서, 성령 개념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 3 >


    성령 체험을 우리가 ‘은사’(카리스마)라고 표현하는 것은 성령이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는 역동적인 능력으로 체험되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하나님께서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고, 한번 받은 은사를 인간이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성령은 바람처럼 불고 싶은 대로 불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요 3,8), ‘보혜사’, 우리를 대신하여 변호하시면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진리의 영(요 14,26)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언급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고전 12,4-11)


    은사는 다양하지만, 결국 그 모든 은사를 나누어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지요. 다시 한 번 은사는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사 간의 우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 4 >


    그런데 문제는 초대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 문제를 중심으로 교인들 가운데 분열과 다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방언의 은사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진 교회는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방언이 다른 은사보다 특별한 관심을 끈 것은 방언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적인 비밀스런 말로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고전 14,2).


    그래서 방언을 말할 수 있는 신자는 그렇지 못한 신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바울은 방언의 은사보다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그것은 방언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이지만,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하고(고전 14,14), 무슨 뜻인지 남이 알아듣지 못하니 결국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것(고전 14,9)이고, 자기에게만 덕을 끼치지만, 예언은 교회에 덕을 끼치기 때문입니다(고전 14,4).


    바울은 자신이 ‘누구보다 더 많이 방언을 말할 수 있지만,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기 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의 깨친 마음으로 교회에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한다.’(고전 14,18-19)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은사가 되었든지,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강조합니다.(고전 12,7).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다르고 다양하듯이, 받은 은사도 다르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다름이 차별과 교만의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와 하나님의 은사의 풍요로움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모든 은사들 가운데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고 하면서, 사랑의 길을 제시합니다.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이라고 합니다(고전 13,1-13).


    그렇지요. 사랑보다 더 큰 은사는 없습니다.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지지만,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고전 13,8).


    < 5 >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역사 속의 성령운동은 양날의 칼처럼,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0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은 흑인 여성의 방언체험에서 시작되었는데, 흑인여성해방, 반교권주의, 엄숙주의와 형식타파, 춤과 노래, 자유로운 기도로 진행되는 예배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08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은 암울한 식민지시대에 영적 출구를 제시하였고, 1970년대 복음화대성회와 이른바 ‘삼박자 구원론’은 산업화의 고통을 견디면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성령운동은 개인영혼구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공공성과 복음의 사회적 책임성을 약화시켰고, 신앙의 개인화와 시장화(이른바 번영의 신학)를 조장하였으며, 박정희 개발독재와 유착하여 반공주의를 내면화하고 극우적 애국주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이웃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고,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영 체험을 강조함으로써 기복주의에 기울어졌으며, 성경을 무시하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김명혁 박사는 오순절운동이 주장하는 신유와 이적 등, 성령의 외부적 은사들이 한편으로 전도와 교회성장에 긍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적 체험이나 현재적 축복을 갈망하는 비윤리적, 기형적인 신앙운동을 초래하기도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 6 >


    이렇게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성령운동, 은사운동은 결국 그것을 받아드리고 실천하는 신앙인, 신앙공동체에 따라 성격과 방향이 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방향에서 실천된다면, 성령의 역사는 전통과 관습에 얽매인 공동체의 영성을 활성화하고, 교회를 역동적인 선교 공동체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갱신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성령의 은사를 갈구해야 하며, 교회에 덕을 끼치도록, 성령의 은사를 더욱 넘치게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고전 14,12)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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