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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우리는 인간의 삶을 시기별로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으로 나눕니다. 삶을 이렇게 나이에 따라 구별하는 것은 이런 전환이 단지 신체적 변화만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변화를 동반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환기는 성장과 성숙,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그것은 “모든 삶의 시기가 전례 없이 새롭고 유일하며 또한 영원히 사라져가기 때문이고, 지나간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오고, 상실의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기의 전환기인들 힘들고 어렵지 않은 시기가 없지만, 그 가운데 어쩌면 노년기로의 전환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 후기 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노인의 좌절 10가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노인의 열가지 좌절이란,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곡할 때에는 눈물이 없고, 웃을 때에는 눈물이 흐르며, 30년 전 일은 모두 기억되어도 눈앞의 일은 문득 잊어버리며,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는 것은 없고 모두 이 사이에 끼며, 흰 얼굴은 도리어 검어지고, 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지는 것이다.”


    성호 이익이 안타깝게 생각한 노인의 좌절 10가지는 대부분 우리의 육체적 변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늙으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더욱더 구체적인 의미에서 적대적이 됩니다. 층계는 더 오르기 힘들고, 도로는 더 건너기 위험하고, 짐은 더 들기 힘들어집니다. 운전하는 것도 힘들어지지요. 게다가 권태와 사라짐에 대한 기다림으로 쉽게 우울증과 불쾌감이 생겨나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 시대 노인의 좌절은 개인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인 변화에서 더 심각합니다. 젊은 세대는 오랜 삶의 다양한 경험에서 오는 노년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길잡이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로 여깁니다. 노인에 대한 존경은커녕, ‘틀딱충’, ‘할매미’, ‘연금충’ 같은 노인혐오언어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교양인 2021년)이라는 책을 쓴 저자 김영옥은 이렇게 답합니다:


    “노년의 지혜란, 노년들은 긴 시간을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니 삶이라는 여행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다음 세대에게 소중한 안내판 한 두 개쯤은 전승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는 삶이라는 여행의 의미를 다면적으로 묻고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싹튼다. 삶의 의미가 활용 가능한 자원이나 기술 등을 이용해 얻는 성공이나 부, 권력으로 환원되는 사회 문화 맥락에서라면, 지금과 같은 기술 환경에서 노년들에게 청해 들을 지혜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오직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자원이라는 시각에서만 제기되는 곳에서, 인간이 오직 쓸모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세상에서는 나이 든다는 것, 노년의 지혜라는 것이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시대에 나타난 가장 수상쩍은 현상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삶을 단순히 젊음과 동일시하는 경향입니다.’ 특히 사회의 고령화와 기대 수명의 증가는 노년으로 갈수록 젊음의 숭배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렇다고 젊음 숭배의 책임을 모두 젊은이들에게만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는 고집불통의 노인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폭군처럼 주변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노인들이지요. 참으로 불행하게 노년을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라틴 문학에서 최고의 문인이자, 로마 최고의 웅변가, 최고의 정치 지도자였던 키케로(기원전 106-43)는 기원전 44년, 곧 안토니우스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 당하기 한 해 전인 예순 두 살에 ‘노년에 관하여’를 썼습니다. 이 책에서 키케로는 늙음이 왜 불행인지에 대한 네 가지 근거를 제시했는데, 대부분 우리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령의 시기의 특징은 시대를 막론하고 다 비슷했나 봅니다. 모든 경험의 형태와 행동 동기, 활동방식이 원천적인 독자성과 강도를 잃어가고, 열정이 사라지고, 감각적인 수용능력도 줄어듭니다. 신체 기관들이 삐걱대기 시작합니다. 지각의 섬세함과 정확성도 떨어지지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도 힘들어지고, 삶의 흐름도 경직됩니다. 대신 쉬고 싶어지지요. 삶의 반경이 줄어들고, 매사에 무심해집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존재와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든 괘념치 않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입니다. 정신적 능력이 저하되고, 영혼의 감수성, 깊이, 분별력도 떨어져갑니다. 그 대신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은 원초적인 물질적 욕구, 먹고 마시고 안락함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러나 모든 노인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늙는 데도 올바르게 늙는 경우와 잘못 늙는 경우의 구별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년에 대해 젊은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는 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이탈리아 태생의 독일 가톨릭 신학자인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1968)는 올바르게 늙기 위해서는 늙어간다는 사실을 내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당연한 것도 또 쉬운 일도 아닙니다. 늙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느끼기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노년의 삶이 더 참되고 가치있게 되기 위해서는 늙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노년 역시 삶의 한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노년은 그저 말라가는 샘도, 한 때 탄탄하고 힘이 넘치던 형태가 허물어지는 과정도 아닙니다. 노년을 그 자체로 고유한 양식과 가치를 가진 삶입니다. 물론 노년은 죽음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역시 여전히 삶입니다. 죽음은 단순한 중단이나 소멸이 아닙니다. 죽음 안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죽음은 무화가 아니라 삶의 완성과 관련된 가치이지요. 물론 단지 시드는 죽음 몰락으로서의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완성과 완결로서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노년은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면서, 죽음을 받아드리면서 살 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노인에게 시간은 항상 너무 짧거나 너무 깁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노년의 장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노인은 생을 그 전체에서, 그 자연적 흐름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즉 그 출발점으로부터가 아니라 종결점으로부터 삶을 고찰하지요. 그래서 노인은 특히나 생의 공허함을, 세계의 모든 화려함, 위대함과 빛남의 무실함과 공허함을 완전히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노인은 생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표상을 얻게 됩니다. … 70세에 비로소 사람들은 전도서의 말씀,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고 합니다.


    노인이 되면서 우리가 ‘시간이 희소하다고 경험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이 단순히 짧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누구나 세상에서 태어나는 한 번뿐인 출생과 맞이해야 할 한 번뿐인 죽음 사이에서 오로지 한 번뿐인 생을 이 세계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오로지 한 번뿐인 생의 시간을 가집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 번만 살고 한 번의 생의 시간만을 가집니다. 그 시간의 짧음 때문이 아니라, 생의 시간의 유일성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래서 시편 90편의 시인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다.’고 노래한 것이지요(시 90,10).


    그러나 시인은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시 90,4-12).


    ‘지혜의 마음’, 곧 우리의 삶도 끝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마음이지요. 그러나 끝은 시간의 종말이 아닙니다. 독일어로 ‘완전히 끝낸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는 ‘Voll-endung’인데요, 이 단어는 동시에 완성을 의미합니다. 끝은 단절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말이지요.


    또 우리말 ‘끝난다’는 말도 ‘끝에서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이 끝난 후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지 우리는 모릅니다. 마치 시간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가 모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은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아닙니다. 영원은 시간 이전으로의, 혹은 시간 밖으로의 여정이지요.


    영원이란 양의 많고 적음과 관련된 문제가 아닙니다. 측정불가능할 정도로 길게 늘인다고 영원하지 않은 것이 영원해지지는 못합니다. 영원성은 질적 다름이고 자유이며, 제약받지 않는 절대성입니다. 영원성은 목숨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입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성인이자 추기경이었던 카를로 보로메오에게 누군가 물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한 시간밖에 살 수 없다고 한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그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특히 더 잘하겠노라고.


    그렇습니다.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불안해하지도 않고, 남김없이 향유하려는 욕심도 부리지 않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서두르지도 않고, 점점 줄어드는 시간을 온통 채워넣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신명기 법전에 의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그 사람은 물론 그의 자손이 오래오래 잘 살 것이라고(신 6,2). 심지어는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까지 길이길이 삶을 누릴 것(신 11,21)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 곧 시간과 공간이 없어질 때까지 영원한 삶은 전혀 다른 삶을 의미하지요. 진정으로 자유한 삶, 모든 욕망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된 삶, 이것이 은혜 안에 있는 노인의 삶입니다. 이런 삶,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에큐메니안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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