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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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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37] 






    < 1 > 사도 바울의 편지들 


    사도 바울의 삶과 신학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사도행전과 그가 남긴 서신들뿐입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바울을 저자로 추정하는 것은 13개의 서신들인데, 학문적 연구결과 7개의 편지만이 확실하게 바울이 쓴 편지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 7개의 편지를 저작 순서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입니다.


    바울의 추종자들이 쓴 글로 추정되는 편지들은 골로새서, 에베소서이고, 바울의 진정서신 중 하나를 서툴게 재진술한 편지는 데살로니가 후서입니다. 바울의 편지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편지들은 디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입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대략 예수님의 사후 20년쯤에 씌어졌습니다. 바울 또는 다른 작가들(예를 들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저작자로 돌리는 다른 신약성경의 나머지 서신들은 바울의 진정 서신들보다 20년에서 50년 후에 기록된 것들이며, 바울이 쓴 서신의 형식을 모방한 것들입니다.


    < 2 > 바울에 대한 평가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보다 더 나쁜 인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의 근본정신을 매장해버렸다고 주장합니다. 갈릴리 출신의 방랑 설교자였던 예수의 단순한 가르침을 허황하고도 암울한 신학으로 대체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그의 친구 윌리엄 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최초로 오염시킨 자’라고 했고, 버나드 쇼(Bernard Shaw, 1856-1950)도 자신의 희곡 ‘안드로클레스와 사자’의 서문에서 ‘예수의 정신에 바울 정신의 결점들이 덧씌워진 것보다 더 꼴사나운 덧씌우기가 여태껏 저질러진 적이 없다’면서, 1928년에 쓴 편지에서는 ‘바울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위해선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니체(F.W.Nietzsche, 1844-1900)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 적대자’에서 바울을 ‘나쁜 소식 전달자’, ‘증오심을 부추기는 데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도대체 바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한 편으로 이런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바울에게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또 바울이 인간을 ‘인간의 지체 속에 있는 법’에 굴복시키고, 인간을 육신이라는 덫에 걸리게 함으로써 그 어떤 도덕적 노력이나 종교적 규약을 통해서도 해방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바울은 염세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불러 일으켰다, 여성 적대적이다, 결혼, 동성애자들에 대한 공격의 적절한 무기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 대한 부정적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니었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 내부의 한 개혁운동가에 머물렀을 것인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종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 3 > 바울의 탄생과 성장


    바울은 예수와는 달리, 그리스-로마 문헌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교 문헌들도 바울에 관해서는 끝까지 침묵을 지킵니다. 바울의 이름은 ‘탈무드’와 ‘미드라쉬’뿐만 아니라,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저술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울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는 누가의 사도행전과 바울 자신이 쓴 편지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자료들을 중심으로 바울의 생애를 구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르소) 출신이며, 시리아(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길리기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사도행전 덕분인데, 사도행전은 이 사실을 바울의 소명,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체포와 관련하여 세 차례 확인해줍니다(행 21,39; 22,3). 누가가 전하는 바울은 ‘이름 없는 시골 태생이 아니라,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 유대인’입니다.


    다소는 ‘길리기아 평야 서쪽에 있습니다. 평야는 도시 뒤로 넓고 비옥하게 펼쳐지고, 여기저기 부드러운 구릉들이 활기차게 물결치다가, 급기야는 하늘로 용약하여 멋들어지게 지평선을 갈라놓는 타우루스 산맥의 우람한 앞산에 가로막힙니다.’ 치드누스 강은 도시를 가로질러 흘렀고 배가 다니면서 남쪽으로 13km 남짓 떨어진 바다와 다소 시를 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소는 지중해 교역과 연결되어 있었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부터 소아시아의 에게 해까지 통하는 주요 도로 상에 있었습니다.


    기원전 1,200년 이후, 히타이트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다르소는 알렉산더 시대까지 서방보다는 동방, 페르시아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았음을 말해 줍니다. 다소는 페르시아에 예속된 토착민 왕들이 다스렸고, 나중엔 페르시아 지방총독들이 통치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BC 323)이 이 도시를 정복한 후, 다소는 갈수록 그리스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그리스 철학의 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인 스트라본(Strabo, BC 64년– AD 24년)에 따르면 바울 시대의 다소는 교육과 철학 분야에서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우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스토아 철학자 중 첫손에 꼽히는 아테네도로스는 다소 출신으로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의 명성은 대단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6-AD 14)는 그를 스승으로 택했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문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은 우리 각자의 양심입니다. 신이 당신을 보고 계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신과 대화하십시오.’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Cicero, BC 106-BC 43)도 다소의 로마 지방 총독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다소의 번영에는 길리기아 관문들을 통한 교역 외에도 비옥한 토양도 한 몫을 했습니다. 특히 곡물과 포도주, 아마가 풍족히 생산되었습니다. 아마는 속주의 주요 산업인 아마포 직조의 원료였는데, 다소가 그 산업 중심지였습니다. 염소 털과 가죽 가공도 융성했습니다.


    바울은 서력 기원 무렵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빌레몬서를 – 여기서 바울은 노인으로 자처하는데(나 바울은 늙은데다가 이제…) – 50세쯤에 썼으리라는 데서 비롯한 추정입니다. 당시 쉰 살이면 노인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보다 몇 살 연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보도에 의하면 바울은 조기 출산한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8)라고 자처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병고로 - 아마도 안질로 추정되는 – 고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도시에서 바울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아들로서 바울은 다른 혈통과 다른 민족들과 만났으며, 세계의 개방성도 체득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다소라는 도시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의 사물을 보는 시각이 전 세계라는 차원을 열정적으로 감싸 안고 있었으며, 도시적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오랜 선교 여행이 그에게 폭넓은 시야를 마련해주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강조합니다. 그는 히브리인, 이스라엘 사람, 아브라함의 후손(고후 11,22)입니다. 로마서 11장 1절에서는 자기가 베냐민 지파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3,5에서는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가족이 순례 축제 때 종종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갔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바울의 한 누이가 예루살렘에서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는 사도행전 23장 16절의 전언도 믿을 만하게 여겨집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사도행전에만 나오는데, 사울이라는 이름이 사내아이에게 붙여진 것은 가족이 베냐민 지파에 속했고, 사울 왕도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가정이나 친지, 동아리에서 사용된 별명이고, 바울은 주명이었으리라는 견해가 널리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그의 편지에서 오직 바울이라는 주명만을 사용했습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로마인에게는 드물고 비로마인 특히 그리스 동방에서도 극히 희귀한 이름인데 어떻게 해서 아이에게 붙여졌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바울의 부모가 어떤 사회계층에 속했으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편지 수준을 볼 때, 또 후에 천막장이 직업으로 볼 때도 중산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천막장이는 천막 천만 생산한 것이 아니라, 길리기아 지방에 풍부했던 염소 털과 가죽으로 덮개, 옷, 모자, 안장 등도 만들었습니다. 유대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율법뿐만 아니라 밥벌이 일 한 가지를 가르쳐 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2,25-29에 따르면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부모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물려받았음을 뜻합니다. 로마 시민은 사법, 소송법, 국법상의 특권들을 보유했습니다. 부모에게 물려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황제가 특별한 공로나 정치적 고려에 터해 개인 혹은 집단 전체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0-BC 44)와 아우구스투스가 그런 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속량을 통해 시민권을 얻는 것이었습니다(바울을 심문하던 천부장도 돈을 많이 들여 시민권을 산 것으로 말합니다. 행 22,28). 교부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 348-420)는 바울의 부모가 모국 유대 땅에서 소아시아로 노예로 잡혀왔고, 어떤 로마 시민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가 나중에 그들을 속량해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따르면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 연설 서두에서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나서, 이 도시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행 22,3)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또 다른 보도는 사도행전 26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살아온 삶을 모든 유대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내가 내 동족 가운데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처음부터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으므로, 증언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들은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격한 파를 따라 바리새파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행 26,4-5). 이로써 우리는 바울이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부모가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 신명기 5장과 6장에 쓰여 있는 율법(토라)의 중요한 계율들과 대축제에서 찬양하게 될 시편 113-118편을 배우게 됩니다. 어린 사울은 여섯 살에 회당의 학교에 가서 민족 역사를 배우고, 그 다음 해에는 삼손의 영웅담이나 다윗 왕의 승리담 같은 성경에 나오는 역사를 배웠을 것입니다. 열 살이 되던 해에는 랍비들의 수많은 금기사항들과 그보다 더 많은 의무사항들을 기록해 놓은 ‘언약’(미스나)을 배워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다섯 살에는 ‘탈무드’를 배웠을 것으로 소티리오스 트라바스 대주교는 추정합니다.


    바울의 부친은 비교적 부유했고, 아들에게 율법교사가 되기 위한 최상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 열다섯 살의 바울을 예루살렘의 성전 신학교로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 모든 랍비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가말리엘이 이 학교의 교장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처음 체포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변론할 때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나는 유대인입니다. 나기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났지만, 바로 이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선생 아래에서 우리의 조상이 전해 준 율법에 대해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행 22,3).


    당시 예루살렘은 약 5만 5천명의 주민을 가진 학문과 상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은 성전과 예배의 도시였고, 정기적으로 엄청난 순례자 무리를 끌어들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디아스포라 유대교인들이 그들의 고유한 회당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그리스어만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회당들에서는 그리스어로 예배가 거행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9절은 자유인들(아마도 로마인들의 노예였다가 속량된 사람들인 것 같다), 키레네인들, 알렉산드리아인들, 길리기아인들, 아시아인들을 위한 회당들이 있었음을 확인해줍니다. 젊은 바울도 예루살렘에 있는 길리기아인들의 회당과 접촉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 발치에서 배웠다는 가말리엘은 25년에서 50년 사이에 활동한 바리사이요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 율법교사로 불립니다. 바리사이 율법 준봉의 특징은 자신들이 발전시킨 해석 전통들(조상들의 전통이라고 불리었다)을 율법(토라) 자체와 마찬가지로 극히 소중히 여기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했으며 이를 아예 부수어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일에서는 내 동족 가운데에서 같은 또래의 많은 이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었으며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을 지키는 일에는 특별히 열심이었습니다.’(갈 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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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ravaggio,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 (1600-1601) ⓒWikipedia


    < 4 >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 유대교를 분열시키는 기존의 파당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 등과 같은 하나의 파당으로 묵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상이한 율법관, 예루살렘과 다른 축제력, 십자가에 달렸던 자를 메시아로 선포한 것, 메시아는 이미 오셨고 그 분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이미 도래 했다는 믿음, 이런 믿음에서부터 의식과 율법을 더 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주장, 이방인들을 온전한 자격 있는 구성원으로 공동체 안에 수용한 점, 할례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세례가 할례를 대체한 점, 그럼으로써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의 경계가 사실상 무너졌다는 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제한 없는 구원이 주어졌다는 주장 등이 바울을 격분시켰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과 힘을 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회당 법정은 형벌을 부과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사도로서 회당의 전형적인 처벌인 서른아홉 대의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는데(고후 11,24), 이 형벌의 시행은 로마의 행정 구역에 있는 회당들에서도 분명히 가능했습니다.


    < 5 > 바울의 회심과 그 후의 삶


    바울이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는 보도입니다(행 7,58).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있었던 바울은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을 마땅히 여긴’(행 8,1) 인물이었고,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면서,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긴’(행 8,3) 바리사이파였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예수의 제자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행 9,1-2)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바울이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사도행전은 바울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음성만을 들었을 뿐 바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했습니다.


    그 때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환상 중에 주님을 만나, ‘직가’(곧은 길)라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바울을 찾아 안수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아나니아도 바울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행 9,13-14).


    우리는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처음으로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5-16).


    아마도 주후 33년 혹은 34년경으로 추측되는데, 바울은 이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참으로 험난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선교 여행에서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다.’(고후 11,23-28).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받은 고난 외에도 개인적인 질병으로도 고생했습니다. 심한 안질로 알려진 이 병을 고쳐달라고 바울은 주님께 세 번 간구했으나, 주님은 바울이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 7-10)


    주후 58년 오순절, 바울은 세 번째 선교 여행을 완수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협력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주교 야고보 사도와 사도들이 있는 교회를 찾아가 헌금을 기탁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예루살렘 신자들과 고통을 나누기 위해 모은 헌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다고 들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울을 알아보고 대중을 선동하여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 바울을 죽이려고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치안을 맡고 있던 로마군 파견대장이 자신의 휘하 백인대장과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바울을 유대인들에게서 빼내 병영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34절에서 26장 마지막 절까지 누가는 바울이 처음 예루살렘과 가이사리아에서 2년 동안 구금당한 것에 관해서, 유대인들의 음모에 대해서, 로마 총독 펠릭스 앞에서 바울이 했던 변론에 대해서, 그의 후임인 보르기오 페스도 총독과 헤로데 아그리빠 왕에게 했던 바울의 마지막 변론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페스도 총독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재판하도록 유다 의회에 바울을 넘겨주려는 것을 알아챈 바울은 그런 기소로 사형을 언도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이용, 로마 카이사르 법정으로 상소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중대한 범죄로 기소된 로마 시민권자는 로마에서 재판받을 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로 압송당한 바울은 2년 동안(주후 60년-62년) 영어의 몸으로 있었는데, 이 기간에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사도행전은 여기서 멈춥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순교하기까지의 행적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그가 처음 감옥에 갇혀있던 기간, 즉 주후 61-63년에 썼던 다섯 편의 편지와 그 이후 쓴 세 편의 서신들이 그것입니다.


    이들 서신들은 로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꾸준히 늘어났음을 알려줍니다.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 내가 갇힌 일 때문에 많은 교우들이 주님을 더욱 확고히 믿게 되었고 이제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용감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빌 1,12-14).


    바울의 재판은 2년이나 늦어졌습니다. 수많은 주요 사건들을 다루던 로마 법정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네로가 임명한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인 페니우스 루푸스(Fenius Rufus)가 바울 사건을 맡아 주후 63년 여름에 재판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루푸스는 바울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4년 동안의 영어 생활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된 바울은 어느 곳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후 67년 봄 바울은 디도를 달마이아로 보내고(딤후 4,10), 자신은 로마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전승에 따르면 로마 수비대가 바울을 체포했고, 같은 해 가을, 두 번째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습니다: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딤후 4,6-8).


    로마 시민으로서 바울은 참수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손이 묶인 채 로마에서 5km 정도 떨어진 성 밖 사형 집행장에서 바울은 동쪽을 향해 큰 소리로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로마 병사가 칼을 내려치자 바울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고, 떨어진 머리가 세 번 튀어나간 자리에서 샘물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시신을 수습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유해를 농장 내 숨겨진 작은 장소에 묻었는데, 3세기 발레리아누스 황제(재위 253-260) 박해시대까지 그 곳에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후 베드로의 성해와 함께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 카타콤으로 옮겼는데, 교회는 두 사도의 성해를 구하고 지켜낸 것에 크게 감사하며 성해를 옮긴 날인 6월 29일을 오늘날까지도 두 사도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4세기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승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는 두 사도의 첫 무덤이 있던 곳에 작은 성당을 세웠는데, 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장남과 차남인 동로마제국 아르카디오스(재위 395-408) 황제와 서로마 제국 호노리오스(재위 395-423)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당을 세운 자리에 바실리카 양식의 성 바울 사도 대성당을 세웠습니다. 이 성당은 주후 395년에 완공됐으며 그 넓고 웅장함은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교 건축물을 압도했는데, 불행하게도 1823년 화재로 유실되었고, 그 자리에 지금의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이 성당 제단에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1). 빌립보서 1장 20-21절의 말씀을 개역개정판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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