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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의 영혼의 밤] 3장 육신의 문제와 통증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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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과주의에 바르게 대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과주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실패에 대한 분석과 성과에 대한 성경적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젊은 그리스도인은 경쟁이 아니라 성경적 목마름과 고상(高尙, excellence)함에 대한 추구를 일찍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적 목마름이 일의 출발이다. 

    선교나 전도나 학업이나 직업이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실 때 먼저 우리로 소원하게 하시고 또 이루는 능력까지도 부여하신다.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여기에서 ‘소원’을 ‘성경적 목마름’으로 풀이했다. 원(願)은 근원 원(原) 자와 머리 혈(頁) 자의 합성어다. 가장 꼭대기이고 근본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원함에서 시작된다. 인생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고상함이 바로 원함이다. 원함은 신위적인 믿음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단어다. 주님은 가장 귀한 명령을 하실 때 원함을 사용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願하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願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먼저 로마서 12장 1-3절의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린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경적 목마름이 따라온다. 그러나 자신만을 추구하는 이에게는 이 목마름은 야망(野望)이 된다. 산 제물로 자신을 드렸는가 아닌가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몫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기 마련이다. 산 제물로 자기 몸을 드렸는데도 여전히 분별력이 희미할 경우 일단 그 소원을 행해 보면 그것이 야망인지 거룩한 목마름인지 분별이 온다. 시도함이 없으면 모든 것은 탁상공론이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을 돌아보고 산제물로 자신을 드린 바 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 관건이다. 만일 드렸다면 그 다음은 시도만이 남는다. 이론이 닿지 않는 곳에 일어나는 시행착오가 필요한 영역이 산제물로 드리고 난 후다. 


    그런데 ‘성경적 목마름’ 즉 원함으로 시작을 해도 육신으로 끝날 수가 있다. 사울이 그랬고, 발람이 그랬고, 유다가 그랬고, 젊은 부자도 그랬고, 기복신앙이 그러하다. 그래서 이때 요구되는 또 다른 중요한 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상함을 추구함’이다. 


    고상함(高尙)을 추구함 

    고상함은 영어로 ‘excellence’에 해당한다. 이는 덕(德), 탁월성 등으로 번역되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자기의 영광과 덕(고상함)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고상함’을 추구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임해서 세상과 짝하는 것을 피해 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고상함을 추구하는 태도는 귀하다. 만약 주어진 일이 죄와 연관이 있으면 회개를 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면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 보아야 하고, 이도 저도 아니면 시도해 보아야 한다. 


    고상함을 추구한다는 말은 경쟁과는 전혀 다르다. 경쟁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다. 내가 앞서지 않으면 네가 앞선다는 관계나 고상함을 추구하는 것은 나의 빈곳(허점)을 채워 넣는다는 말이다. 캔버스의 빠진 곳을 채워가는 화가의 붓과 같다. 그 화가는 화폭에 자신이 그릴 수 있는 최상의 그림을 그린다. 물론 그의 최상의 그림은 다른 이의 그림에 견주어 객관적으로 평가를 받지만 그 화가가 고상함을 추구하는 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의 빈 곳은 하나님도 채우시지 아니하신다. 왜냐하면 그 채움을 바로 나의 몫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탁월성 추구’와 여기에서 언급한 ‘고상함 추구’는 외형은 유사하지만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전자는 탁월성을 인간 스스로 매진해서 만들어 낸다는 의미지만 ‘고상함’은 하나님께서 이미 숨겨 놓으신 보물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보물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인본주의 결정체라면, 이미 숨겨 놓으신 선물을 찾는 것은 전혀 다른 동기 부여이고 다른 수행 방법이다. 그래서 신앙과 종교는 다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그 보물을 찾는 행위 속에 두 가지가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보물을 찾는 과정과 찾아낸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으로 찾는 과정이다. 찾아내거나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결과다. 결과물은 하나님 소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책임이 있지 않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목마름에 합당한 즉 믿음에 일치하는 우리의 시간과 자원을 투자함을 말한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보물을 여기저기 숨겨 놓으시고 우리가 직접 찾아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만남을 위해 이 보물 찾기라는 절묘한 핑곗거리를 만들어 내신 것이다. 혹 어떤 이는 보물을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결과 지향적인 실수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보물을 찾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교제시간을 가지는 것 자체를 중요하고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 보물을 찾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젊을 때 그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경우, 그 보물을 이용해야 하는 고유의 목적을 동시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보물을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면 경쟁은 더 이상 우리를 묶지 못한다.


    달란트를 발견하기 위해서 고상함을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므로 복지부동의 자세를 유지하면 된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혹 발견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에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은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는 자처럼 ‘영적 소극성’(마 25:18)을 범하는 것이다. 영적 소극성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치명적인 유혹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살 때 성공을 포기하라는 말은 더더구나 아니다. 성공은 고상함을 추구할 때 생기는 부산물일 뿐이다. 이는 철저히 하나님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거룩한 목마름’으로 시작해서 ‘고상함을 추구’한 사업이었는데 결과는 실패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성경적 원리대로 사업을 했는데 결과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왔다는 말이다. 잘되면 기쁨을 나누고 결과가 좋지 못하면 교훈을 얻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만일 결과가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거룩함이 있다면 전부를 이룬 것이다. 하나님은 성과라는, 목마름이라는, 고상함이라는 핑계를 통해서 우리와 교제 나누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며 그 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없다. 


    지금의 한국 젊은이들은 지난 30년 동안의 고속 성장 후유증으로 소진과 성과주의와 무한경쟁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만일 교회가 또 하나의 짐을 더한다면 큰일이다. 이제는 ‘고상함에 대한 추구’를 경쟁이라든지 완벽함이라는 메커니즘과 바꿀 때다. 보물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최선이라는 시금석을 이용하여 고상함을 추구하면 하나님과 또 자신과의 평안이 찾아오고 하나님의 성품인 고상함을 경험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영광을 입는다. 이 영역은 아무도 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신다.


    만일 경쟁이라는 단어를 꼭 사용해야 한다면, 경쟁이란 서로의 최선의 일상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위적인 믿음이 오면 경쟁이란 의미는 없어지고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계(행 17:26) 안에서 누리는 자유함만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 성과주의에 덜 예민해질까? 요즈음 용어로 50세가 되면 미모 평준화, 학력 평준화, 직장 평준화, 건강 평준화 등 여러 면에서 평준화가 온다고 하는데 사실일까? 그나마 사회가 인정하는 평준화에 나의 몸을 맡겨 버릴까? 입시지옥을 통과한 이들의 노년은 어떨까? 영화나 소설이나 공상세계에서는 늙음이 작업의 주제도, 선택할 주제도 못된 채 밀려난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 직접 부닥치고 넘어지는게 다반사다. 다행히 현찰이 있으면 모든 상처를 임시미봉 정도는 할 수가 있다. 오죽하면 어떤 설교자가 우스갯소리로 50세 넘는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현찰이라 했을까? 과연 그런가? 


    그리스도인은 나이에 관계없이 성공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해야 한다. 성경적 목마름과 고상함에 대한 추구함이 삶에 적용되면 나이와 관계없이 최선의 삶을 경험하고, 비록 육체의 기력이 쇠락해도 거룩함이 주도하는 신위적인 믿음의 삶으로 이어진다. <계속>


    성경적 상담 세미나 문의: isaya5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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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이민 

    1981년 오하이오주립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1년 정년 후 해외 직장생활을 접고 36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

    삼성물산 고문을 지냈으며,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산학협력교수,

    현재는 한동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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