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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의 영혼의 밤] 3장 육신의 문제와 통증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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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중독   

    정도 차이는 있지만 성경적 상담을 원하는 이들은 대개 현대 교회의 특징 중 한 가지인 ‘종교중독’ 성향을 보인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는 종교중독에 빠진 유대인들의 일상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오늘의 교회는 물론 구약의 유대인들이 끈질기게도 종교중독에 빠진 이유 중 하나는 믿음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옮겨가지 못하고 한 지점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믿음이 머무르면 피상적 종교 생활로 접어들게 되는 데 바로 그 상태가 ‘종교 중독’이다. 


    교회출석이 습관화된 이들에게 엿보이는 가장 곤혹스러운 문제가 바로 종교중독이다. ‘독실함’과 ‘종교중독’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다. 이단을 좇는 맹신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종교 중독보다는 깊이 숨겨져 있어 미묘하고 쉬이 분간하기 어려운 종교중독이 더 큰 문제다. 이런 종교중독은 많은 혼돈을 일으켜 신위적인 믿음을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영적소진이나 영적폭행은 종교중독과 밀접하다. 유대인이 특권의식 및 양반의식의 변종인 종교 중독에 빠져 있다면, 한국인은 거의 대부분 종속의존적 또는 성과주의 육신에 의한 관계 중독에 빠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의 종교중독을 몰라보지만 불신자들은 묘하게 지적을 해낸다는 점이다.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한계를 보고 주님을 모시기 시작했다 해도 육신의 활동을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예전처럼 답습하면 이 중독에 빠진다. 즉 외면적으로 명패만 바꿨을 뿐 그 내면을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육신이라는 메커니즘이다. 신앙생활은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모태신앙 이든 아니든 주님과의 관계가 시작되면 생활환경과 태도를 새롭게 정비하여 살아가지만 육신은 여전히 왕성하게 살아 있어서 그 육신에 자신을 맡기면 돌연변이인 종교중독을 빚어낸다. 믿지 않던 생활에서 벗어 났다고 하나 불신에서 종교중독으로 쉽게 탈바꿈하고 마는 것이다. 


    신앙생활이 시작되면 파괴적인 중독에서 점차 헤어 나온다. 그러나 깊게 숨어 있는 종교중독처럼 파괴적이지 않은 중독은 영혼의 밤을 맞이하기 전에는 좀처럼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이제까지 모든 중독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준 신앙생활이 어느 날부터 종교생활로 엮어 들어갈 만큼 종교중독 육신은 교활하고 교묘하다. 


    1980년대부터 유행처럼 번졌던 복음주의 지도자의 외도사건도 종교중독의 여파이고, 흔히 겪는 교회의 분란의 시초도 그러하다. 이러한 분란의 중심인물들은 대개 평균 40대 중반, 50대 초반의 카리스마 있고 역동적인 설교자들이나 평신도들로서 자신들의 노력대로 가인처럼 이 땅에 무언가를 쌓자마자 종교중독에 휘둘림을 당한 좋은 사례들이다.


    정우는 이민 1.5세다. 20대 중반에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소그룹 운동에서 주님을 알게 되어 헌신했고 열심이었다. 복음 주의자의 전도로 회심을 했기에 그 역시 전도에 열심을 냈다. 심지 어 믿지 않는 이들의 구원이 전도하지 않는 자의 책임이라는 설교를 받아들였기에 전도를 전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에 중압감을 느꼈고, 어떤 방식으로든 주님의 일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통제했다. 나이 들어 시작한 버거운 의학공부에 그의 일상은 조그만 쉼도 없건만 담임목사는 모든 집회에 참석하라는 요구를 했다. 특히 수요 집회는 그에게 고역이었다. 그에게 수요예배에 집중이 잘 되는지를 묻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천만에, 내일 칠 시험 걱정에 설교는 전혀 들리지 않고 안절부절 못할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수요예배를 참석하지 않고 공부를 하면 어떠냐고 묻자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수요예배에 참석해야 하는데 큰일”이라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쉰다.


    심각한 종교중독이고 복음주의 중독이다. 종교중독에 빠져드는 까닭은 생명이신 주님과의 교제가 아닌 조직이나 계획이나 습관이나 잘 짜인 프로그램을 분별없이 신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육신을 알지 못 한 채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면 이러한 함정에 빠져서 올바른 성경적 신앙생활을 습득하지 못하고 종교중독으로 나아간다. 종교중독은 다른 형태의 성과주의 육신이다. 어떤 종교중독은 스스로 특별하고 싶어하는 이에게 일어나는 육신의 교묘한 활동의 결과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특별 존재가 되고 경쟁이 필요 없는 고유한 삶의 목적이 부여되고 열등감이 없어지고 행복은 더 이상 추구의 대상이 아닌 삶의 기반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종교 중독 사례를 보여주는 인물이 바울과 베드로다. 성경에는 중독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바울과 베드로의 관계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종교중독에서 벗어났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서는 천하의 베드로가 자신의 종교 중독 때 문에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야단친 이는 바울이고 야단맞은 이는 베드로다. 그런데 두 사람의 공통점은 종교 중독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점은 바울은 중독에 흠뻑 젖었다가 해방되었으나 베드로는 여전히 종교 중독에 잡혀 있었다는 점이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어떻게 종교중독에서 놓여나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베드로가 공중 앞에서 의도된 대면을 하도록 이끈다. 즉, 의도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한 장면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종교중독에서 놓여나는지가 보인다.


    베드로는 처음 3년간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주님의 신실하심을 보았고, 자신이 얼마나 육신에 묶여 있는지 깨달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 50일과 그 후의 나날은 베드로에게 꿈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153마리 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질 듯했던 일. 성령이 장대 비처럼 임하고 난 후 한 번의 설교에 3,000명이 한꺼번에 회심했던 일. 걷지 못하던 이를 걷게 했던 일. 돈에 메여 있던 부부가 하나님을 속이 다가 죽었던 일. 죽은 아이가 기도로써 살아난 기적. 지난날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이상들이 자신을 통해서 일어나는 현실에 베드로는 다시금 주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에 탄복하고 감격할 따름이었다. 


    베드로가 갈라디아서 2장에 등장할 때는 이미 17여 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종교중독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로마 장교 고넬료를 만나 심각한 신앙의 도전을 받았으나 베드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유대인들을 복음화하는 일에 여전히 충실했다. 이방인들을 전도하는 일은 자신의 전공이 아님을 잘 알았기에 바울이나 바나바에게 일임을 하고 남의 땅에 건물을 짓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이방인들과 부딪칠 일이 많지 않았기에 자신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종교중독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이방인 교회 안디옥에서 식사를 하던 중 유대인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그는 슬며시 돌려 앉으려다 바울에게 직통으로 공개 망신을 당한다. 


    이른바 주님과의 독대를 한 것이다. 주님과의 독대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가진 종교 중독 때문에 망신당했다. 요즈음 말로 ‘오픈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중독치료의 첫 단계이다. 스스로 도움받아야 한다는 자각이 없다면 상담은 이루어지지도 않고 또 결과도 없다. 도움을 받으려면 자신의 어두운 면을 여는 것이 먼저다. 곰팡이가 슨 눅눅한 이불을 밝은 햇빛에 말리는 것과 같다. 만일 자신의 중독을 알고 있다면 먼저 하나님께 열어 보이고, 자신을 아끼는 가까운 이에게 시인하여 보라. 그러면 곧 하나님의 방법인지를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나 사탄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코 열어 보이지 못하게 온갖 공격을 한다. 


    기둥같은 베드로가 공개적으로 바울에게 망신을 당했을 때 베드로는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회개를 하던가, 순간적으로 창피를 모면하기 위해 무슨 말을 둘러대든가 아니면 그 이상의 에너지를 가지고 바울의 공개적인 망신에 대한 성경적인 오류를 잡아내어 역공을 하는 방법이다. 이 중에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답게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비록 바울을 통해 성경에 기록될 만큼 공개 망신을 당했지만 그 후 베드로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가 종교중독에서 해방된 탁월한 영성을 보여주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벧후 3:15).


    베드로가 바울의 편지나 말을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가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절절히 나타난다. 베드로는 바울의 공개적인 성토가 주님의 직접적인 개입이심을 안 것이다. 중독은 끈질기고 모질다. 그러나 스스로 주님 안에서 자신의 비밀스럽고 괴로운 것을 열고자 하는 이에게는 통회자복하는 가난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중독에서 해방시키시며 상상하지 못하는 자유를 부산물로 주어 주신다. <계속>


    성경적 상담 세미나 문의: isaya5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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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이민 

    1981년 오하이오주립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1년 정년 후 해외 직장생활을 접고 36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

    삼성물산 고문을 지냈으며,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산학협력교수,

    현재는 한동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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