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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의 영혼의 밤] 제2부 제1장 십자가의 비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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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절망했기에 온전한 믿음을 경험했다. 사방이 막혔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절망(絶望) 또는 체념(諦念)이다. 고통이 다가오면 인생은 자신의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하지만 마침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하면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한다. 


    글자 그대로 절망은 모든 소망이 끊어진 희망이 없는 상태이고, 자신의 마지막 남은 카드를 다 쓴 영혼의 밤의 한복판이다. 어떠한 능동적인 행동이 주어지지 않고 철저히 수동적인 환경에 도달한 것이다. 비참함 속에 온갖 수모를 느끼고 절망에 도달하지만 그 아픔이 싫고 찌질하기에 거의 대부분의 인생은 절망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를 노려보며 교활하게 웃고 있는 차선의 선택을 취한다. 바로 동양철학의 해탈의 경지 중에 한 가지인 체념(諦念)이다. 


    체념의 사전적 의미는 도리(道理)를 깨닫는 마음 또는 아주 단념함이다. 살필 체(諦)는 말씀 언(言) 변에 황제 제(帝) 자다. 황제의 말이 기에 나의 모든 생각을 살핀다는 능동적인 표현이다. 이 점이 절망과는 확연히 다르다. 절망은 글자 그대로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태이고 더 이상 능동적인 일을 도모할 수 없는 상황이며 자신의 모든 자원이 고갈된 상태다. 


    그래서 신위적인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처절한 실망과 그리고 나의 무능함을 먼저 경험해야만 한다. 체념이 설 자리는 한 치도 없다. 이제 남은 결론은 체념이 아니라 소망 없음을 그대로 시인하고 받아들이는 수동태의 극치인 ‘거룩한 수용’이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운명적인 수용(fatalistic acceptance)과는 철저히 차별된다. 


    인생이 절망이나 체념을 만나면 큰 변화를 겪는다. 그 이유는 한 인격체의 죽음이 절망이나 체념 뒤에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죽음의 모양은 동일하지만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체념을 하는 순간 스스로의 능동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이기에 그것은 자살(自殺)이다. 그러나 절망에 처하면 오직 철저히 수동적이기에 자살이 아니라 타살(他殺)이다. 


    유명인들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안타깝기만 하다. 삶의 막장에 몰리는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무의미하고 오직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마지막 남은 카드 한 장만이 유일한 방법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카드까지 버리는 것을 성경은 ‘십자가상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인간 역사 이래 죽음을 앞두고 주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십자가의 강도 중 한 명에게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에 의해 타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일한 거리에 있었던 다른 강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으나 실은 십자가 상의 타살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스스로 지불했으므로 자살이다.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타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완벽하게 자신의 모든 주권을 드려야 한다.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자에게만 타살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십자가 상의 타살은 아무나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이후의 삶을 하나님께서 짊어지시겠다는 약속을 감히 받아들이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자신의 마지막 목숨을 내려놓지 않고 어떻게든 스스로 지키려 한다. 


    우리 손은 한 번에 하나만 쥘 수 있다. 이 세상 것으로 자신의 손을 채우고 있으면서 천국도 움켜 쥐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이 세상 것을 놓고 대신에 하나님 것을 그 빈손에 채워야 한다. 놓는 것이 움켜 쥐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 약속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믿음이고 자신이 가진 빵 전부를 물 위에 던지는(전 11:1) 행위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믿음으로 살 수 있는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감행하지 못하는 것이 십자가 상의 죽음이다. 


    이때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에 우리가 십자가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낭패다.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엡 2:5-6).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달려 죽고 함께 장사되지 않으면 함께 부활하는 일도 없다.


    십자가에서 타살이 이루어지려면 스스로의 모든 노력이 철저히 무너져야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를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는 이 세상 것으로 자신을 가리고 체면을 유지하고 남의 눈치를 보고 적당히 타협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라고 합리화를 한다. 인생은 절망의 순간에 어떻게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지 하나님을 잡으려 하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타살인 십자가 대신에 자살을 택한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지 않는 것이 주류다. 백척이나 되는 장대 위에서는 도무지 어떻게 할 무슨 행위도 허락되지 않은 상태지만, 그때도 인생은 지푸라기를 잡으려고 하지 하나님을 신뢰하여 기꺼이 죽는 한 걸음을 떼지 못한다는 말이다. 광야의 60만의 유대인들이 그러했고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는 무수한 교인들도 그러하다. 절망의 장대 위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한 걸음 나아가 ‘타살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신위적 믿음이다. <계속>


    성경적 상담 세미나 문의: isaya5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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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이민 

    1981년 오하이오주립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1년 정년 후 해외 직장생활을 접고 36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

    삼성물산 고문을 지냈으며,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산학협력교수,

    현재는 한동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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