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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의 영혼의 밤] 영혼의 밤에 경험하는 인도하심의 증거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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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대의 형태는 위로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강한 책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독대는 평안할 때보다 난처한 때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아담, 가인, 아브라함, 욥이 그랬다.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다. 아예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고백이 나올 정도로 하나님을 원망한 엘리야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독대하신 하나님. ‘왜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하셨나요’라는 처절한 질문이 하나님과 독대할 수 있는 이유처럼 들린다. 


    그러나 불행히도 독대 이후에도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젊은 부자가 그러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가 그러했고, 빌라도가 그러했고, 구약의 많은 선지자나 제사장이 그러했다. 기가 막힌 예언을 했던 발람도 독대의 결과가 죽음으로 나타났다. 또한 많은 신약의 방백들도 마찬가지다.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일컫는 독대란 무리 가운데 홀로 하나님을 은밀히 만난 뒤 인생이 확연히 달라진 경우다. 무거운 죄 짐을 진 삭개오도 주님을 뵐 수 있다는 말에 인생의 모든 질문이 풀려 버린다. 빌립보 간수는 직업의 현장에서 그러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차한 질문에 대해 대답하시는 대신 독대를 허락하신다. 하나님을 홀로 뵙는 것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푸는 근본적인 열쇠라면 밤은 결코 무거운 시간도 괴로운 시간도 아닌 전적으로 나의 실체를 보는 시간이고 하나님을 홀로 만나는 시간이고 육신을 대면하는 시간이고 나 자신을 알아보는 축복의 시간이다.


    독대에서 일어나는 것은 감정의 교환이다. 필자는 종종 성경 공부 시 참석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현재 자신을 괴롭히는 느낌을 솔직히 적은 뒤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느낌이 왜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는지를 밝혀 보라는 질문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이는 그렇지 않다. 자기 통제를 잘한다는 것은 마음을 통제한다는 말이지, 느끼지 않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시하면 큰일이다. 즉 감정은 있는 대로 느끼지만 표현은 가려 하라는 말이다. 시편 기자와 베드로는 감정을 더욱 자극적으로 표현한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吐)하라"(시62:8).

    "너희 염려를 모두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거룩한 수용(受用) 

    영혼의 밤에는 불편함과 불행과 부족함만 있다. 이것들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수용하는가에 따라 평강의 깊이가 달라지고 영혼의 밤 이후의 삶의 질 또한 달라진다. 계속해서 환경이 바뀌기만을 기도하면 밤은 점점 깊어지고 어두움은 더욱 짙어 간다. 나의 기도로 보좌를 흔들려 할수록 밤은 더욱 적막강산이다. 밤은 밤이다. 환경을 바꾸는 일은 낮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이 단절된 시간이다. 더 이상 어제까지 해왔던 종교생활은 접자. 만일 아직도 종교생활이 유익하다면 밤이 아니다. 이제까지의 삶의 전반을 점검하고 골방에서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며 자신의 모든 자산을 총결산할 때다. 자신의 모든 자산을 과용(過用)했거나, 오용(誤用)했거나, 횡령(橫領)했거나, 전용(轉用)한 모든 잘못이 낱낱이 밝혀지는 시간이다.


    세상은 최대한 많은 것을 최소한 짧은 시간 안에 가지라고 재촉한다. 세상을 이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획득하거나 그럴 수 없으면 없음을 수용하거나 둘 중 하나다. 가지지 않음과 불편과 불행을 감수해야 하고 그에 따르는 통증 또한 수용해야 한다.


    수용이라는 단어 자체가 피동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거룩한 수용이다. 수동적으로 수용해도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다. 많은 종교가들이 경험하는 수용이 그러하고 분리(detachment)도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독대 후에 이루어지는 성경적인 거룩한 수용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거룩한 수용이라는 말 자체가 환경에 변화가 없다는 결론을 전제로 한다. 바울의 세 번의 기도, 입다의 딸의 죽음, 모세의 죽음, 요나단의 죽음, 요시야의 죽음, 하박국의 기도가 그러하다. 환경에 변화가 오지 않아도 삶을 수용하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만이 경험하는 비밀이다. <계속>


    성경적 상담 세미나 문의: isaya5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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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이민 

    1981년 오하이오주립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1년 정년 후 해외 직장생활을 접고 36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

    삼성물산 고문을 지냈으며,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산학협력교수,

    현재는 한동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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