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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대가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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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작성일2020-09-30 | 조회조회수 : 1,66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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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 W. 지프 | 환대와 구원(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 | 송일 옮김 | 새물결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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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고 식사 자리에 외인을 초대하여 담소를 나누는 장면은 신약성서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크리스틴 폴은 『손대접』에서 환대가 초기 기독교의 소중한 유산이자 기독교 사회윤리의 핵심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정도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칭의와 성화, 구원과 윤리의 전통적인 순서, 즉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에’ 선한 사업을 하고 높은 수준의 도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도식을 뛰어넘고자 한다. 이 책에서 지프는 환대와 구원을 동치시키고 있다. 즉, 환대는 단지 구원받는 성도의 사회적 행동이 아니다. 환대는 기독교의 구원론의 핵심이다. 충격적인 주장이다. 그의 주장을 소개해 보면 이렇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먹이고 양육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잔치에 초대해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에 비견되고 하나님의 환대를 공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는 장면이 나오고(25:6-9),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그 잔치에 초대한다(55:1-2). 예언자 에스겔은 메시아의 임무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먹이는 것이라고 말한다(겔 34:23-24).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환대, 구원, 평화로운 관계를 공유하는 날을 고대하고 기다렸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탁 교제가 그렇게도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탁 교제는 종말론적 잔치를 미리 맛보여준 자리였고, 이 잔치는 더 나아가 가난한 자들, 갇힌 자들, 눈먼 자들, 억눌린 자들을 초대하는 잔치였다(52쪽). 예수님은 식탁 교제를 통해 외인들이 하나님의 친구로 바뀌고, 그들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환대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식탁 교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고 비계산적인 환대를 베푸는 것”(54쪽)이다. 예수님은 세리, 죄 많은 여인, 가난한 자와 부정한 자, 심지어 바리새인들과 식사 자리를 함께했다. 다른 이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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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아테네 베나키 박물관에 전시된 <아브라함의 환대>


    초대교회 역시 예수님의 식탁 교제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빵을 떼고 음식을 나눌 때, “다양한 사회 계층과 민족 그리고 남녀로 구성된 다양한 친족 무리 내에서 환대와 음식의 비호혜적인 나눔”을 실천했다(62-63쪽). 하나님의 환대는 당시에 사회적으로 포용하기 어려운 개인이나 집단을 끌어안음으로써 문화적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이를 전복시켰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이들을 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낙인과 고정관념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거부”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는 이처럼 경계가 없다. “야만인”과 “이례적으로 친절한” 성격을 연결하고(행 28:1-10), “사마리아인”과 “이웃”이라는 이질적 카테고리를 연결한다(눅 10:33-36). 낯설고 모순 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선교는 경계를 허물며 전진했다. 


    혹시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이방인 개종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빌립이 복음을 전한 에티오피아 내시다(행 8:27). 그는 흑인이면서 성적으로 소외된 자였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거세된 자나 고환이 상한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가는 이 내시를 “덕의 표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쯤 되면 베드로가 옥상에서 부정한 음식을 받아먹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 장면을 지프는 이렇게 설명한다.

    경계를 허물고, 낙인과 고정 관념을 전복하며, ‘타자들’로 인해 오염되거나 전염된다는 신념을 무시하는 것이 교회의 정체성의 일부로 제도화된다. (72쪽)

    죄인들을 교회에 초대하고 그들을 성도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들의 죄를 간과하거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회개와 배상과 도덕적 변화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환대를 경험하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예수님의 식탁 교제와 그에 따라 구성된 초대교회는 이토록 위험하고 전복적인 것이었다. 오늘 우리네 교회는 너무나 ‘안전’하고 ‘정상적’인 동질 집단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지프가 이 책에서 계속해서 주장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환대를 받았다면,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을 똑같이 환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환대로 교회가 탄생했으니, 우리도 사회적, 민족적, 성적 차이로 말미암은 분열을 제거하고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환대해야 한다(131쪽).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환영해야 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이스라엘의 정체성 자체가 나그네이자 이민자였다. 이스라엘 족장들은 남의 땅에서 오랜 기간 체류자로 살았고, 이집트에서는 노예로 살았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나를 받았고, 다윗 왕조의 기원인 룻은 모압 여인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이주민, 체류자, 손님이었다(248쪽). 하나님의 사랑과 환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타인을 환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자 소명이다.

    그동안 우리는 타인을 환대하고 외인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 사회윤리의 핵심이라고 말을 많이 해 왔다. 그런데 그 타인이 누구인지, 그 외인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물어보면 슬며시 말끝을 흐린다. 우리는 이웃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명제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그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어보면 대답을 회피하곤 했다. 타인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호명할 때, 거기에 왜 동성애자는 포함되지 않는지, 불법 이주민들이나 난민은 왜 배제되는지,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는 왜 우리의 이웃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이라는 카테고리에 어떤 조건을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우리의 인식적 카테고리 안에 포함된 타인만을 환대한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성경에서 말한 환대의 의미를 제대로 구현한 것인지 진지하게 물어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이미 마음에 설정해 둔 경계를 넘어 진짜 타인을 대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베드로가 옥상에서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할 때, 왜 두렵지 않았겠는가? 무섭고 긴장되었을 것이다. 이래도 되나 싶었을 것이다. 율법이 금지한 음식을 먹으라는 음성이 사탄의 음성은 아닌지, 흑인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타당하기는 한 건지…. 하지만 그렇게 복음은 전파되고 하나님의 역사는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였다. 그래서 리처드 커니는 낯선 이방인은 마치 처음 보는 괴물처럼 두렵고 떨리는 존재라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전적인 타자로 우리 앞에 현현하며 낯선 존재로 자신을 드러낸다(커니의 책 제목은 『이방인, 신, 괴물』이다).

    인간은 누구나 익숙하고 비슷한 것에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반면, 낯선 존재를 만나면 위협을 느낀다. 유유상종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동안 같은 인종, 같은 민족, 같은 집단끼리 똘똘 뭉쳐서 자기들의 성을 쌓고, 성 밖의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척해왔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폭력을 가져올지 모른 채 말이다. 타인을 환대하는 것은 그저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사업이나 기독교 사회윤리의 하나로 치부될 수 없다. 환대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고, 폭력의 고리를 끊어버리겠다는 결단이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구원 역시 하나님의 환대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대가 구원이다.


    최경환(과학과신학의대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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