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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꼴찌로 붙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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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작성일2023-01-30 | 조회조회수 : 1,4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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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시험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학교에 진학할 때나 직장에 들어갈 때가 그럴 때입니다. 운전 면허증이나 시민권을 따기 위해 시험을 치를 때도 그렇습니다. 그런 시험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는 사람도 있지만, 꼴찌로 겨우 합격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뜻밖의 은혜를 입은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더 좋습니다. 


    지난 주중에 저도 꼴찌로 붙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런데 꼴찌로 붙었음에도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배심원을 뽑는데 꼴찌로 붙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배심원으로 나오라는 소환장을 받았는데 교회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몇 번을 미뤘더니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태에서 지난 월요일부터는 꼼짝없이 법정에 출두해야 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확인해 보니 다행히 월요일에는 나올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먼저 경험하신 분들이 첫날 나오지 말라고 하면 계속해서 나가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해서 잔뜩 기대하면서 월요일 저녁에 확인했지만, 화요일 아침에는 나오라고 했습니다. 


    LA 다운타운에 있는 법원에 아침 8시 15분까지 가기 위해서는 집에서 6시 30분에는 출발해야 했습니다. 아침 트래픽을 뚫고, 지정된 건물에 주차하고 10분 정도 걸어서 법원에 들어섰습니다. 처음 하는 배심원이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돌아왔다고 하는데, 저는 첫 번째 배심원단을 부를 때 뽑혔습니다. 


    50여 명의 배심원 후보들이 재판이 열리는 다른 건물로 이동했습니다. 공항에 들어갈 때처럼 삼엄한 검사를 마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더니 이번에는 복도에서 한참을 기다리게 하고는 한 사람씩 출석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에 법정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판사는 특별한 사유가 있어서 재판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말하라고 했습니다. 주로 경제적, 언어적, 의료적 이유를 대며 몇 사람이 판사의 허락을 받아 돌아가고 48명이 남았습니다. 판사는 모두 일어서라고 하더니 무작위로 선출된 번호에 따라서 자리를 지정해 앉혔습니다. 저는 41번째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모두가 앉은 것을 확인한 판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하면서 뒷번호부터 7명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총 48명 중에서 7명, 그러니까 48번부터 42번까지 돌아가고 저는 그야말로 꼴찌로 배심원에 뽑혔습니다.


    그때부터 판사는 배심원으로서 지켜야 할 사항들을 설명했습니다. 재판 내용에 대해서는 서로 말해서는 안 되고, 양쪽 변호사들과는 눈인사도 나누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41명의 배심원 후보가 자신들의 직업과 주거지, 가족관계와 가족의 직업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각자 알아서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에 다시 모이라고 했습니다. 한낮의 햇볕을 즐기면서 한참을 걸어 점심을 먹고 왔습니다. 배심원들에게는 하루에 $15씩을 준다는데, 점심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셨더니 하루 일당을 이미 초과해 버렸습니다. 


    점심 후에 자리를 잡은 배심원들을 향해 양쪽 변호사는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 같은 배심원을 뽑았습니다. 저는 배심원으로 선출되지는 못했지만, 예비 배심원으로 남아 이튿날에도 가야 했습니다.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증거로만 판단해 줄 것과, 재정적인 상황은 고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어떤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갖지 말아 주십시오.” 증거를 중심으로 법적인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동정심이 자칫 잘못된 결론을 내릴 우려가 있기에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 말이 목사인 제게는 굉장히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이요, 중심적 가치라고 믿고 강조해 왔는데, 그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말을 듣는 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길이 멀었고, 하루 종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기도 쉽지는 않았지만, 다른 배심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 미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를 성실히 감당했다는 자긍심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앞으로 1년은 배심원에 다시 불릴 일이 없다는 약속과 함께 잘 마쳤다는 증명서까지 받았습니다. 비록 꼴찌로 붙은 배심원이었지만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할 수 있었기에 큰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창민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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