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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수(妙手)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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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작성일2023-05-24 | 조회조회수 : 1,77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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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이나 장기에서 쓰는 ‘묘수(妙手)’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신통한 효과를 가져오는 절묘한 수를 말합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아 패색이 짙을 때, 남들이 생각해 내기 힘든 기묘한 수로 빠져나간다면 그때 둔 수를 ‘묘수’라고 합니다. 


    인생에도 가끔 ‘묘수’가 등장합니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분야에서 의외로 성과를 낸다면 ‘묘수’라고 합니다. 남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기발한 것으로 성공을 거둔다면 역시 ‘묘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도무지 출구를 발견하지 못할 때 기막힌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면 ‘묘수’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묘수’의 대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왔을 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는 ‘묘수’를 보이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자, 이번에는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 군대가 홍해에 들어섰을 때 강물을 다시 흐르게 하셔서 그들을 물리치는 ‘묘수’를 두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어떻게 하겠냐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한다면 사랑과 용서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용서하라고 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묘수’였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묘한 도움을 받을 때는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이야말로 ‘묘수’의 대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얼마 전에 교회에 새롭게 등록하신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가 평안하고, 은혜로워야 할 텐데 연초에 교단 탈퇴를 결정하는 교인총회를 겪으면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교회에 등록하시고 나오기 시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잘 정착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더니 그분이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 있겠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무심코 하신 말씀인지 모르지만, 저는 그 말을 듣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하나님의 묘수’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지도 못하는 ‘묘수’를 두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배 후에 하나님께서 절묘한 방법으로 우리 교회에 보내주신 교우들을 환영하는 ‘새가족 환영회’를 합니다. 어른 22명, 아이들 6명을 새가족으로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이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이분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우리에게는 절묘하고 놀라운 ‘묘수’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정수(正手)’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묘수’가 위기를 넘어서는 절묘한 수라면 ‘정수’는 속임수나 홀림수를 쓰지 아니하고 정당하게 두는 기술을 뜻합니다. 


    바둑에서 ‘묘수'를 연발해서 이기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바둑을 전문으로 두는 프로 기사들은 ‘정수’는 따분하고 지루한 수지만, 바둑을 줄기차게 이기기 위해서는 괴롭지만 ‘정수’를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묘수’만 바란다면 스스로 행한 일이 결국에 가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자충수(自充手)’가 되기 십상입니다. 또 자기 욕심만 부리다가는 ‘묘수’라고 둔 수가 정도에 지나치게 벗어나는 ‘무리수(無理手)’가 되거나 ‘악수(惡手)’가 될 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은 ‘묘수’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시는 ‘정수’를 두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두신 수는 사랑의 ‘정수’였습니다.


    인생에도 신앙생활에도 ‘묘수’는 없습니다. 그저 기도하고 말씀 중심으로 살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정수’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조금은 밋밋하지만, 사랑의 ‘정수’를 두며 삽시다! 


    이창민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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