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비츠, 단테 그리고 임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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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첫날이었던 지난 화요일 오후,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로 향하는 프리웨이는 꽉 막혀 있었습니다. 교통체증을 뚫고 시간에 맞춰 할리우드 볼에 겨우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주차장을 지나쳐서 한 바퀴를 더 돌아야 했습니다. 어렵사리 차를 세우고 입구에 도착하니 입장하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한국말로 인사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저도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음악회를 관람하기로 한 우리 교회 찬양대 대원들과 교우들은 물론, 오랫동안 뵙지 못했던 옛 교우들도 만났습니다. 낯은 익지만, 어렴풋한 기억 속에만 머무는 분들과도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곳곳에 있는 피크닉 테이블마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 온 이들, 학교 동문회, 교회와 직장에서 나온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찍 도착해서 자리를 맡은 교우들 덕분에 우리 교회 식구들은 한 곳에서 편안히 식사할 수 있었습니다. 김밥과 빈대떡, 닭강정, 과일과 빵으로 차려진 조촐한 식탁이었지만, 남가주의 여름밤을 할리우드 볼에서 맞는다는 설렘과 오랜만에 야외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는 기쁨이 소찬(素饌)을 성찬(盛饌)으로 만들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객석으로 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17,500명을 수용하는 대형 야외극장의 맨 뒤편 구석 자리라 무대는 까마득했지만, 할리우드 볼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정갈한 풍경에 감탄하면서 공연을 기다렸습니다. 공연 시각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중간중간 빈자리도 보였는데, 어느새 관객들로 가득 찼습니다.
해걷이바람이 한낮의 열기를 식히고, 할리우드 뒷산에 걸려 있던 해가 어스레한 땅거미를 남기며 저물 때쯤 LA 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성시연 객원 지휘자와 피아노 건반을 연상시키는 검정 바지에 하얀색 재킷을 걸친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당차게 무대로 들어왔습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자신의 이름을 세계 무대에 알린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곡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기 위해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지휘자와의 가벼운 눈맞춤으로 시작된 연주자의 손놀림은 잔잔하고 부드러운 도입부를 지나면서 점점 바빠졌습니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포트워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임윤찬의 연주를 지휘했던 마린 알솝의 말처럼 ‘심오한 음악성과 경이로운 기교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세밀한 피아노 연주가 관객들을 깊은 감동의 세계로 안내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3악장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3분, 연주가 절정에 다다르자, 화면에 비친 연주자의 손이 겹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긴 머리를 흩날리며 건반 위를 달리던 연주자의 손이 마지막 터치 후에 피아노 위로 높이 솟구쳐 오르는 것과 동시에,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질주하던 자동차가 급제동하듯 멈추면서 약간의 여운을 남긴 채 온 세상을 일순간 고요하게 만들었을 때였습니다. 관객들은 용수철처럼 한꺼번에 일어서면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브라보’를 외쳤습니다.
여러 번의 커튼콜 후에 연주자가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을 때까지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임윤찬은 앙코르곡으로 쇼팽의 ‘이별의 노래’를 들려주면서 아쉬워하는 관객들의 마음을 달랬습니다.
연주회에서 받은 감동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습니다. 스물도 채 안 된 젊은 연주자가 내뿜은 에너지는 단순히 타고난 재능과 훈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임윤찬은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를 제대로 이해하고 연주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외울 정도로 읽었다고 했습니다.
또,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익히기 위해, 라흐마니노프 곡을 탁월하게 연주했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영상을 1,000번 이상 보았다고 합니다. 그 영상은 호로비츠가 75세 되던 해인 1978년, 주빈 메타와 함께 연주했던 것으로 유튜브를 통해 480만 명이 시청한 전설적인 영상입니다. 임윤찬도 호로비츠처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인의 자긍심을 한껏 뽐낸 임윤찬은 그날 할리우드 볼을 찾은 많은 한인 이민자에게 큰 위로와 자부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날 할리우드 볼 관람 행사를 위해 수고하신 찬양대 임원들과 참가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또 이날 행사를 후원해 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창민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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