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 시대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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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상용화가 임박했다는 소식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감염병 대유행의 위협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고, 바이러스가 완전히 퇴치되지 않는 한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존재하는 삶을 살아가는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연합감리교뉴스는 ‘코로나바이러스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시대의 기독교 시리즈’를  매주 연재한다. 오늘은 번째로 시카고예수사랑교회 조선형 목사의 글을 소개한.)

사진 제공, 조선형 목사. 사진 제공, 조선형 목사.

팬데믹의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여기저기에서 ‘뉴노멀(New Normal)’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뉴노멀' 이란 ‘새로운 일상’이라는 뜻인데,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의 뉴노멀은 마냥 새롭기만 하다는 뜻은 아니다. ‘과거의 일상’에서는 떠나 왔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할 ‘새로운 일상’에 도달한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끼어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잘 묘사할 수 있을까 싶은 말이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 긴장과 막연함 등의 감정과 그로 인한 삶의 피로와 무게는 어쩌면 이러한 시기를 사는 우리에겐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이혼율이 급증하는 사회 현상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교회 또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므로 이러한 영향들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일반 사회 기관이나 공동체와는 다른 점이 있다. 교회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규정한다. 그 말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을 따라 영향을 받아 움직인다는 뜻이다.

‘뉴노멀의 시대’로 그동안 수면 아래 있었던 많은 논쟁의 이슈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교회 안의 여러 전통과 믿음의 추구 혹은 작동 방식 및 본질과 비본질의 이슈들을 다루는 작업도 마냥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의 변화를 미룰 수 없는 교회의 모습에 대해 고민하며 나름 방법을 실험하고 있는 목회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의 미숙한 생각을 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생존에서 계몽으로!

교회는 위기 앞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모두가 위기인 것을 느끼지만, 그것이 진정 무엇으로부터의 위기인지는 구심점을 어디로 삼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또 ‘무엇을 위해 선택할 것인가’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할 아주 중요한 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로서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일' 즉, 그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마치 머리와 분리된 시체와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의 변화와 교단의 현실 앞에, ‘각 교회는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하게 될 경우, 교회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일과는 멀어질 소지가 다분하다. ‘생존’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자체가 이미 머리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기운이 아닌, 어떻게든 ‘자가 호흡법'을 통해 살고 봐야 하는 문제로 치환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하여'라는 슬로건을 내 건다고 해도, 이미 그 호흡이 위로부터의 호흡이 아닌 ‘자가 호흡’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모든 교회가 어떤 형태로든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생존이 먼저가 아니라 생존의 이유가 먼저일 때, 교회는 살아있고,  제대로 움직이며, 작동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뉴노멀 교회는 ‘생존’이 아닌 ‘계몽’을 향해야 한다.

‘계몽’이란 일종의 ‘각성'이다. 교회가 각성해야 할 때란 말인데, 사실 각성은 방향이 중요하다. 어떤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인 교회들을 계몽시켜,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대세를 따르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교회가 계몽되어야 할 방향이 어느 특정 이슈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보수 또는 진보로 향해서는 안 되며, 오직 진리이자 완전한 기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계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에게로 계몽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 안전하고 푹신한 기초 위에 마음껏 고민하고, 질문하며, 다른 생각과 입장에 서 보는 용기 안에서 깨어나는 일을 말한다.

또한 ‘성경대로 산다, 말씀대로 산다’는 말의 의미 역시 우리는 다각도로 생각해봐야 한다. ‘성경에 적혀 있는 말을 진리로 받아 지키며 산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산다’는 말은 때로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같은 성경적 가치 안에서도 다른 적용과 반응은 나올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둘 중 ‘무엇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을 두고 논쟁하는 방식으로는 답이 나올 수 없다. 통성기도 소리가 큰 쪽이 이기는 것도 아니고, 더 담대하게 혹은 정의롭게 믿음을 외치는 쪽이 이기는 것도 아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몽되는 과정과 질문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충분히 이뤄지도록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성과 영성이 후회 없이 작동되고, 성서와 전통 그리고 경험이 더 풍성하게 교류되는 믿음의 장이 교회 안에 많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엔 용기가 필요하다. 어설프게 물을 방류하려던 댐이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걱정과 염려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제 교회는 조금씩 소통과 배움을 위한 질문의 물을 방류하는 법을 연습하고 익혀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앞으로 다가올 더 거대하고 복잡한 시대를 품고, 소화해 낼 수 있는 영적 소화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 교회는 열이 나고, 몸살을 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몸이 그렇듯, 교회는 이내 치명적인 영적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도록 면역력을 높이고, 강력한 항체를 만들어 낼 것이라 나는 믿는다.    

 

객관식 믿음에서 주관식 믿음으로!

어느 날 아이들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북한도 싫고, 일본도 싫어! 북한 사람들, 일본 사람들은 나빠!” 아마도 아이들이 핵무기로 위협하는 북한 정권과 한국을 식민지 삼았던 일본의 과거 만행에 대해 책을 보고 배운 듯했다.

나 역시 아이들이 왜 그렇게 흥분하며 말하는지 공감하고 이해한다. 다만 아빠로서 내심 살짝 염려하는 마음이 생겨, “북한과 일본에는 나쁜 사람도 있고, 착한 사람도 있단다. 그 나라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야. 알겠지?”라고 말해줬다. 내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분명 시간이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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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식으로는 ‘북한을 나쁜 나라'라고 표현해도 생각하기에 따라 맞는 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주관식으로는 분명 그사이에 생략된 부분들을 언급하며, ‘꼭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어'라고 말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 안에는 더 많은 하나님의 눈물과 마음 그리고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서 자라온 나의 여정을 돌아보면, 믿음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유지하는 방식이 주관적이라기보다 다분히 객관적이고, 단답형에 가까웠던 느낌이다.

어떤 교리를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믿기로 결정했으면, 그다음부터는 그것에 대해 질문이 생기거나 의심이 생기는 것을 터부시하고,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힘써 귀를 막거나 피하든지, 그 요소를 제거해야만 순도 높은 믿음을 유지하고 강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마귀의 유혹과 인간적인 불신앙의 경계를 넘지 말아야 하며, 믿음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그리고 부활에 대한 복음인 ‘케리그마’가 그 믿음의 내용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밖의 문제들에 관해서는 역사적으로 ‘케리그마’의 수준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결코 생각지도 말아야 할 종류의 것으로 삼았던 적은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 당면한 수많은 복잡한 이슈들에 교회는 그동안 객관식 질문에 단답형으로 응답하는 방법을 취해왔고, 믿음을 앞세워 빠른 대답을 종용해 왔다.

더 힘차고, 더 담대하게 고백할수록 흔들림 없는 견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마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확신에 찬 고백을 하는 자녀들을 볼 때, 그 마음과 생각은 이해하지만,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실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에게 “그래! 얘들아 그 믿음과 마음은 알겠지만, 반드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다.”라고 하실 수도 있다.

시대가 변했다. 가능하면 피하고 보면 좋을 ‘뜨거운 감자’ 같은 사회적 이슈들이 수면으로 올라오다 못해 산더미처럼 높이 쌓이고 있다. 안 보이는 척, 못 본 척 시선을 피할 수가 없다. 교회 역시 어떤 식으로든 각 문제에 대한 신학적, 신앙적 입장을 내어놓아야 할 판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밖으로 발을 내딛기가 힘들어져, 뒷골목으로만 숨어 다녀야 할 상황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결국 인종차별, 성정체성, 이민자, 유전자 조작 그리고 인공지능 등 결코 단답형으로 선을 그어 답을 내리기 힘든 복잡한 문제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믿음을 강화해 오던 방식으로는 통하지 않는 시절과 수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세상 정치인 중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비교적 쉽고 간단한 방식을 취하려는 사람도 있다. 보수와 진보, 빨간색과 파란색이라는 진영 논리를 앞세워 사람들을 헤쳐서 모이게 하고, 자신이 속한 진영은 마치 세상의 모든 진리를 독점하고, 상대 진영은 모두 사기꾼과 자기기만을 일삼는 어리석은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으로 믿게 만들어 대적하게 한다. 심지어 세상을 바로 잡아 구원하라는 사명감마저 쏟아붓게 만들고, 문제를 단순화시켜, 자신의 지지기반과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한마디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지혜로운(?) 자들도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도 자칫 잘못하면 이와 비슷한 방식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각각의 지지기반을 형성하고, 성서적 또는 영적으로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선별적으로 귀를 열고, 불리한 내용은 덮어 유리한 내용만 강조하는 행위를 교회도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실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의 부정직함도 감히 수단으로 허용하는 위험천만한 자리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변해야 한다.

단답형의 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한정하고, 나머지는 주관식 답을 찾는 과정을 정직하고 진지하게 지향하며 연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어떤 문제도 짤막하게 답을 내릴 수는 없으며, 이처럼 문제가 복잡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안에 여러 진리의 조각들과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가치들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내 눈엔 작아 보이는 상대편의 제안 속에 있는 진리 조각을 못 본 척하고 넘기는 것은 자칫하면 나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일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신중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상대의 생각 속에 있는 진리 조각을 보고도 신기루일 뿐이라고 여기며 자기 눈을 씻어내려 하거나, 나의 진리 조각의 크기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과 같다고 평가절하하는 것, 심지어 그것을 나의 믿음을 흔들어대는 마귀의 시험과 유혹일 것이라고 덮어 버리는 것은 바른 문제 인식과 답을 찾는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우리의 한계와 무지 그리고 약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강을 앞세워 서로를 배우고 고민하며 진지하게 기도하기 시작할 때, 종국에는 답을 하나만 골라야 하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최선의 답을 풀어가던 과정과 기도하고 애씀이 주님 앞에 있었기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더 나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설령 같은 결론에 이르더라도 그 과정을 주관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빠른 선택에서 바른 관계로!

시카고예수사랑교회에서 지난 7월 줌을 통해 진행한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세미나 포스터. 사진 제공, 시카고예수사랑교회.

지난 3월 이후, 우리 교회도 펜데믹으로 인해 예배와 모임들이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다. 그것을 기회로 우리 교회는 그동안 교회에서는 배우기 힘든 주제들에 관해 전문 강사님들을 모시고, 온라인 시리즈 강의를 시작했다.

처음 4주간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주제로, 또 4주간은 “인종차별과 이민자 문제 그리고 교회와 관계와 역할”에 대해 성도들과 함께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대학원 강의실에서 배우던 내용을 성도들에게 그대로 오픈하고 함께 고민했다. 이웃에 대해 배우고 고민하는 ‘이웃사랑 부흥회’를 한 셈이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이 나라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어디에서 구조적으로 고통을 생산하고 있는지, 이웃의 고통과 아픔의 자리는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실제적인 부분들에 관해 배웠다.

그러자 자연히 그에 따른 교회가 해야 할 일에 대한 고민이 생겨났다.

하나님의 교회가 역사 속에서 기득권자들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일들과 예배 후 마녀사냥을 공공연히 자행했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록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믿음이란 것이 끊임없는 성찰을 통한 성숙으로 이어져 깊어지지 않으면, 한순간 대중심리에 휩쓸려 얼마나 무섭게 왜곡될 수 있으며, 자아도취적인 믿음을 앞세운 채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교회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자각하게 되었다.

성도들에게 자부심과 용기와 위로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영적인 편식은 건강하지 못한 성도, 건강하지 못한 교회를 만든다. 오히려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았기에 아프지만 바로 고쳐 살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교회다운 교회를 함께 세우자'는 들끓는 마음들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시카고예수사랑교회에서는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시간 중에 일정 분량의 시간을 ‘신앙 코칭' 형식으로 진행한다.

어떤 종류의 질문이나 고민을 털어놓고, 안전한 바운더리에서 질문하고 의견을 나누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물론, 나의 부족함으로 모든 질문에 최고 수준의 지혜로 다뤄지지는 못하지만, 완벽에 가까운 답을 얻었기 때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질문과 고민이 투명해지고, 방향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서 안정감을 얻는다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말한다. 또한 이 시간을 통해 교회의 사명과 정체성에 대해 그리고 ‘믿으며 산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생겨났다.

사회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피하거나 혹은 단답형의 답만 제공하고 안도의 숨을 쉬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두루 살피며 적극적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여정에 있다는 사실, 그 여정이 어디에 이르렀든지 주님이 동행하고 있다는 신뢰로부터 평안을 찾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간절히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 믿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신뢰로 인한 평강과 신앙고백이 담긴 뉴노멀 시대의 교회 모습을 그려 본다.

믿음이란 것은 ‘관계'이고, ‘이야기'이며, ‘여행'이다.

다소 두리뭉실해 보일 수 있지만, 믿음은 풍성하고, 소외가 없으며,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이기도 하다.

당장 정답은 내릴 수 없어도, 우리들의 교회가 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생각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평강이 스며든다.

 

시리즈 보기

코로나 시대와 교회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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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동체가 희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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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 본 코로나 시대의 교회: 생명 생태계, 하나님 나라는 계속된다

팬데믹으로 인해 광야로 내몰려 얻은 신학적 반성

거꾸로 자전거와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의 목회 1

거꾸로 자전거와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의 목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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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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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안수 과정에 관한 개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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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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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 하나님 되심을 알기 위해

김정호 목사의 총회 후기. 김 목사는 자신이 연합감리교회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신학하는 과제’(Theological Tasks)가 부재한 목회를 했음을 회개하고, 시대를 분별하며, 그리고 하나님만 하나님 되심을 알기 위해서 잠잠히 깨어 기도하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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