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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고 박희민 목사가 남긴 이야기<1>

에티오피아 첫 한인 선교사로
당시 젖먹이 아이들 풍토병도
뉴욕서 형님 목회 도우며 준비
토론토한인장로교회에서 청빙
교인들의 상처 보듬으려 노력
"그땐 정말 재미있게 목회했다"

지난 2003년 2월 박희민 목사의 모습이다. 당시 나성영락교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사진 기자로 중앙일보에 입사한 뒤 처음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된 인터뷰이(interviewee)가 박 목사였다. 그때 박 목사의 온화한 미소가 아직까지 생생하다. 김상진 기자

지난 2003년 2월 박희민 목사의 모습이다. 당시 나성영락교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사진 기자로 중앙일보에 입사한 뒤 처음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된 인터뷰이(interviewee)가 박 목사였다. 그때 박 목사의 온화한 미소가 아직까지 생생하다. 김상진 기자

미주 한인교계의 거목 박희민 목사가 지난달 26일 눈을 감았다. 〈본지 4월27일자 A-1면〉
 
박 목사는 한인 사회의 산증인이었다. 지난해 3월 본지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 인터뷰를 위해 박 목사를 만났었다. 인터뷰가 총 3차례 진행됐지만 더는 진행할 수가 없었다. 박 목사의 건강 문제로 추가 인터뷰 스케줄 일정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박 목사가 남긴 이야기를 서술 방식으로 기록해뒀다. 못다한 그의 이야기를 종교면에 게재한다.
 
박희민 목사가 지난 2004년 11월 패서디나 로즈보울 경기장에서 열렸던 빌레 그레이엄 목사 초청 집회에서 박영자 사모와 함께 있는 모습. 김상진 기자

박희민 목사가 지난 2004년 11월 패서디나 로즈보울 경기장에서 열렸던 빌레 그레이엄 목사 초청 집회에서 박영자 사모와 함께 있는 모습. 김상진 기자

 
인생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삶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움직인다.

 


여동생의 소개로 영국서 간호학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김영자)를 만났다. 1967년이었다.  
 
결혼한 그 해 교단으로부터 월남 선교사로 임명받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비자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 당시 교단 선교위원장으로 있던 한경직 목사가 갑자기 보자고 했다. 선교 때문에 아프리카를 둘러보고 왔던 한 목사가 "에티오피아로 선교지를 변경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교단의 최고 어르신의 권유이니 군말 않고 마음을 바꿨다. 다시 1년의 준비기간을 가졌다. 공교롭게도 에티오피아 황제의 손녀 소피아 공주가 한국을 방문(1968년 2월)했다. 소피아 공주는 당시 서울영락교회에서 예배도 드렸다.
 
에티오피아와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해 서울영락교회에서 선교 파송 예배를 드렸다. 아내의 손을 잡고 한 살 되던 아들을 안은 채 에티오피아 땅으로 떠났다.  
 
그 당시 한인으로서는 최초의 에티오피아 선교사가 됐다. 막상 가보니 너무나 척박한 땅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고난은 선교사에게 숙명 아닌가. 복음 전파 사역과 구제에만 힘썼다.  
 
에티오피아에서 둘째(딸)를 낳았다.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젖먹이를 키운다는 게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두 아이 모두 풍토병에 걸렸다. 치료약도 없었다. 의료 시설조차 없었다.
 
두 아이들의 몸에서 자꾸만 진물이 나왔다. 너무 가려우니까 자꾸만 몸을 긁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몸을 긁지 못하도록 아이들의 손을 붕대로 감아 놓았다.
 
사명이 있었기에 나는 견딜 수 있었지만 젖먹이 아이들은 도저히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형(박희성 목사)이 뉴욕에서 개척 교회를 준비중이었다. 일단 아내가 아이들(1살ㆍ3살)의 풍토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1971년 6월의 일이다.
 
일단 나는 에티오피아에 남아 사역을 감당했다. 아내는 형님댁에 머무르며 아이들 치료에만 전념했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느정도 사역을 마무리하고 잠시 가족을 보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사이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며 전공을 살려 뉴욕 한 병원에 간호사로 취직했다. 벌이가 생기니 기본적인 생활은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사이 아이들도 풍토병에서 조금씩 건강이 회복되고 있었다.
 
미국에 간 김에 놀고 싶지는 않았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대학원 수업을 들었다. 그때 에티오피아에서 일이 터졌다. 1974년 공산화로 인해 선교의 문이 닫혔다.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국에 눌러앉게 됐다. 다시 한번 삶의 방향이 틀어진 것이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 학위를 받은 뒤 하나님이 어떠한 길로 인도하실지 기다리고 있던 중 청빙 제의를 받았다. 토론토한인장로교회였다.
 
그 당시 토론토한인장로교회는 분쟁으로 인해 갈라져나온 교회였다. 아픔을 안고 있던 교회였다. 청빙을 승낙하기에 앞서 고민과 갈등이 이어졌다. 아내가 간호사로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이도 나쁘지 않았다. 나 역시 개척교회를 하는 형님을 돕고 있었다. 주변 동료 목회자들은 하나같이 만류했다.  
 
그 상황에서 거듭된 청빙 제의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목사는 결국 목회를 해야 한다. 그쪽에서 제시한 사례비는 미국에서 버는 것보다 적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버려야 했지만 결국 소명이라고 받아들였다. 내가 결정을 하니 아내도 주저하지 않고 병원에 사표를 냈다.
 
미국에서 자리 좀 잡아가나 싶었는데 하나님은 다시 한번 나를 다른 길로 인도하셨다. 1974년 7월에 그렇게 토론토로 향했다.
 
당시 토론토한인장로교회는 목사 반대파 교인들이 따로 나와 만든 공동체였다. 때문에 목회자에 대한 쓰라린 감정을 갖고 있던 교인이 많았다. 그러한 교회에 담임목사로 간다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교인들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 목사에 대해 교인들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바꾸려고 했다. 교회에서 사택을 마련하라고 준 돈도 받지 않았다. 그 돈을 다 장학금으로 내놨다.  
 
매일 각 가정을 만났다. 그때 이민목회는 이민자의 삶을 공감하고 같이 삶을 걷는 게 전부였다.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어줬다. 교인들의 손을 잡고 기도해주고 함께 울었다. 그렇게 조금씩 관계가 형성되자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교인들이 마음을 여는 게 느껴졌다.
 
목회자로서 훈련도 많이 받았다. 목회와 학업을 병행하며 토론토대학에서 박사 학위(1982년)도 받고 녹스신학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하며 학생들도 가르쳤다. 잠시 안식년을 이용해 하버드대학에서 '메릴 펠로우(merrill fellow)'로 신학을 연구했다.  
 
나는 토론토한인장로교회에서의 사역을 회상하면 늘 '정말 재미나게 목회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즐거웠다.
 
목회가 즐거워지니까 자연스레 열매가 맺어졌다. 토론토한인장로교회는 어느새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됐다. 이제는 안주할만도 했는데 그 지점에서 문득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나와 교회를 위해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 같았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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