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기 목사의 성경과 정치신학] 제2부 구약교회의 신정정치 - 2. 레위기 법전의 정치신학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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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위기 법전의 정치신학적 특징
모세오경의 언약 중에서 현저하게 드러나 보이는 출애굽기의 ‘시내산 언약’(출 20-23장)에 비하여 레위기는 종종 부수적으로 여겨지거나 생략되는 경향을 보게 된다. 외견상 레위기는 제사와 제사장, 정결 규례와 절기, 그리고 성결 법전(holiness code)로 구성되어 의식이나 예전 차원의 문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는 언약의 차원에서 볼 때 출애굽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서이다. 언약이라는 단어는 출애굽기 19장에서 시작되어, 24장, 34장으로 연결되며, 이는 레위기 26장으로 끝난다. 다니엘 엘라자르는 출애굽기의 십계명에서 시작된 언약의 동심원이 출애굽기의 나머지 부분과 레위기 전체로 확장된다고 말한다. [Elazar, Covenant and Polity in Ancient Israel, 180-84.] 엘라자르에 의하면, 시내산 언약의 정치신학적 의미는 레위기로 지속된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레위기의 정치신학적 의미에 대하여 리처드 보쿰은 레위기 19장을 중심으로 주해한 바 있다. 그는 성결 법전의 중심에 있는 레위기 19장이 십계명 거의 전부를 재해석하고 있으며, 사랑과 정의의 관점으로 정치적 함의를 드러내고 있음을 말한다. [Bauckham, The Bible in Politics, 『성경과 정치』, 75-109. 이 책에서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 레위기 19장” 부분을 참고하라.] 그러나 정치신학적 의미에서 보면 전체 레위기가 심원한 정치신학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레위기에서 거룩한 삶에 대한 세부 지침은 종교적일 뿐 아니라 정치신학적으로 이집트와 가나안이라는 주변의 나라와 구별되는 대조적 공동체, 혹은 신정적 공영체(commonwealth)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백성은 다른 신을 섬기는 주변의 열국으로부터 구별된다. 그 구별은 제사장 나라(priestly kingdom)로서의 구별이다. 제사 제도나 제사장의 세부 규례는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백성의 규례로써 이집트의 다신교와 다르며, 가나안의 몰렉을 위해 인신 제사와 같은 ‘피의 전제’(奠祭, drink offering)를 거부하고 짐승의 제물을 대신 드리는 제의로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나라의 대조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열국 중의 한 민족이 아니라 유일신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는 독특한 신정국가이다. 레위기가 제시하는 제사 및 제사장 규정 전체(레 1-10장)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제사로 구별되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많은 신 중의 하나인 “엘로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의 “엘 엘리욘”이다. 반복적으로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나는 여호와니라”는 서술이 레위기에서 수십 번이나 반복되며 제시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신정정치의 주재인 ‘왕이신 여호와’를 통해 구별된 백성이며, 그 하나님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것이다.
제의(祭儀, ritual)는 정치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구별된 백성의 충성 고백은 제사하는 행위 곧 예배라는 제의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제사, 제사장과 절기의 구조는 민족적 예전의 문제이며, 이 예전적 문화는 정치와 연루된 복합적 차원, 곧 정치문화적, 정치심리학적, 정치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제사와 예배 때마다 해방의 하나님이 기억되며, 현재 시점에서 그에 대한 충성은 재확인되고, 미래에도 소망 가운데 그의 개입이 기대된다.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에 의하면, 이러한 예전이란 ‘준궁극적인 것’(penultimate)으로부터 ‘궁극적인 것’(ultimate)을 구분하는 작업이며, 궁극적인 것이 준궁극적인 것에 흘러들어오도록 하여 궁극적인 것에 복종시키는 충성의 서약이다. [James Smith, Awaiting the King (Grand Rapids: Baker Academy, 2017), 박세혁 역, 『왕을 기다리며: 하나님 나라 공공신학의 재형성』 (서울: IVP, 2019), 55-61, 74-75.] 예전과 의식은 마음으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적 공간적인 외연을 가진다. 만군의 여호와는 현재라는 시간에 바로 이 삶과 예배의 장소에서 충성을 바쳐야 하는 살아있는 존재이며, 예전은 이전의 사건을 현재적으로 복원시키는 행위로서, 하나님 백성의 충성심을 회복하고 반복 유지하며, 심화시키는 방법이다.
레위기의 의식과 예전의 차원은 언약 관계 속에 있는 언약 당사자의 총체적 삶의 구성에 영향을 준다. 거룩함은 언약 당사자인 백성의 일상생활로 확장되고, 이는 가정생활, 성생활과 사회생활과 문화로 확장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러므로 신정국가적 정체성을 가진 백성에게 확장되어 주변의 민족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한다. 예를 들어, 음식법(레 11장)을 포함한 정결 규례(레 11-15장)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이스라엘이 언약의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질병, 체액 유출, 시체 접촉은 한 사람의 사회적 권리를 제한했지만, 사회적 통제 장치로 작용하며 공동체의 정결한 삶을 통하여 공동체적 결속과 통합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사회적 통합의 재확인이라는 결정적 예식은 하나님과 백성이 죄를 극복하는 대속죄일(16장, 大贖罪日) “욤 키푸르”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대속죄일에 그들은 여호와를 위하여 구별한 염소로 대제사장과 백성이 속죄하여 전 국민이 모두 완전하게 죄를 일소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드린 염소를 광야로 보내므로 죄의 척결을 가시화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다음을 참고하라. 하이저는 아사셀을 고유명사로 사용하며 헤르몬산에서 반역을 일으킨 천사들의 대표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Heiser, Unseen Realm, 『보이지 않는 세계』, 308-312.]
신정적 질서의 사회적 확장은 성결 법전(17-26장)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는 당시의 가나안 사람들이 가졌던 가증한 풍습과 단절하는 것으로써, 짐승의 고기를 피와 함께 먹지 아니하고, 우상을 척결하며, 성생활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것 등을 포함한다. 중근동에서의 제의가 우상 숭배와 함께 성적 방종을 동반하는 것으로 볼 때,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는 거룩함과 정결함을 동반하는 것으로 당시의 가나안 족속과 대조를 이룬다. 더욱이 제의적 관례에 연계된 사회경제적 명령은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예배가 이웃 사랑이라는 주변 공동체의 구성원을 향한 자비로운 행위와 분리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안식일, 안식월, 안식년, 희년의 구조는 성막이라는 거룩한 공간과 함께 “시간 속에 임한 거룩한 지성소”이다. 예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막 2:27) 선언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예식에 인간을 향한 배려가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안식일은 토지의 주인만 아니라 더 어려운 상황에 있는 나그네와 행인, 노예와 짐승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다. 사회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이 안식일에 회복을 추구할 수 있다. 이러한 안식은 거룩한 달력으로 7번째에 속하는 티쉬리 월 초하루 나팔절에 나팔을 불어 한 달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였다. 추수하는 달 티쉬리 월 10일에 대속죄일을 지냈으며, 15일에서 22일까지는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의 7일간 축제가 주어졌다. 7년을 주기로 하는 안식년과 희년의 법규(레 25장)는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의미를 지녔다. 안식년은 부채 탕감, 토지 반환, 히브리 노예의 해방과 농사의 휴경과 경제적 불평등 해소 등을 시행하여야 했는데, 7번째 안식년인 49년째와 다음 50년째 해인 희년에는 2년을 연속으로 휴경하며, 기업을 되돌리는 ‘땅 무르기’를 통해 조상의 토지를 다시 회복하여 자유민의 지위를 확보하도록 했다. 이는 고대의 사회보장제로 여겨지는 현저한 예이며, 신정정치를 시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한 놀라운 자비의 실현이었다. 절기의 정신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통합시키는 행위이다. 레위기의 성결 법규는 그러므로 사회ㆍ경제적인 배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예전적(禮典的) 거룩함은 친족의 배려 및 분배정의와 직결되어 있다. [Richard Bauckham, Politics in the Bible, 민종기 역, 『성경과 정치』(논산: 대장간, 2024), 85-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