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환의 예술묵상] 알트도르퍼의 “거룩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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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밤(그리스도의 탄생), 1511,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베를린 국립 회화관 (Berlin, 독일)
어둠이 세상을 덮습니다. 단순히 시간의 순환에 따라 깔리는 어둠이 아닙니다. 절망과 희망의 양가적 무게를 가진 숭고한 어둠입니다. 짙은 어둠 속 유난히 거친 폐허가 먼저 눈에 띕니다.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반복되는 풍경과 그곳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같은 베들레헴, 같은 사람들, 나라 이름만 팔레스타인으로 달라졌습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묘한 기시감, 내가 생각했던 거룩함과 다름에서 오는 불편함이 찾아옵니다.
북부 르네상스 도나우파의 알트도르퍼는 자연 그대로의 묘사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화창한 봄날의 강변을 채색하기도 벅찰 듯하지만, 화단을 이끌던 작가는 되려 밤을 주목합니다. 진정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원초적 자연 자체를 드러내자면 어쩌면 밤이 제격인 듯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어둠이 짙은 밤, 폐허의 벽돌 틈을 유난히도 밝은 달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차갑고 창백한 달빛이 작고 연약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달빛과 천사도 함께 하고, 마굿간의 동물들도 “함께 있어주는” 가운데 신비한 존재가 태어납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은총의 순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어주시고자 오셨는데, 자연도, 동물도 그저 함께 있어줍니다. 그 중심에 가장 가까이서 있어주는 존재는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가장 처음으로 구주를 영접하고 경배한 존재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편 91편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 천사들은 아기 예수를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보호합니다. 하늘에서 예언서를 전하는 <말씀 천사>, 땅의 존재를 지켜주는 <수호 천사> 모두 역사적 사건도, 높으신 분에게만 해드리는 특급 예전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성도> 모두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말씀은 곧 아버지가 될 목수 요셉을 향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마 1:20-21).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리신 이 밤, 하늘의 선포가 땅의 현실이 되는 이 순간을 천사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소와 노새가 아기 곁을 지키고, 자연이 거대한 침묵으로 이 순간을 목도합니다. 그들 모두의 침묵 속에 경이가 있습니다.
멀리 창문 너머로 한 사람이 보입니다. 신성한 사건을 뒤로 한 채 갈 길을 걷고 있는 이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마 1:24)은 순종하고 받아들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꿈 속을 헤매고 살아갑니다. 우리 대부분은 깨어나기 전까지는 보통 이렇습니다. 가장 어둡고 폐허가 된 곳을 뒤로 하고, 곧은 길을 따라 그저 밝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그러나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신기루 속을 거니는 인생들입니다.
그런 존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함께 계셔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꿈에서 깨어나도록, 오늘도 미사일이 오가고,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아이들을 지켜낼 수 없는 폐허를 향해, 또 세상의 불균형과 부조리를 향해 눈을 돌리고 손을 모을 수 있도록 오셨습니다.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밝고 즐거운 것으로 우리를 재미있는 꿈 속에 살게 만드는 것의 대표작은 “쇼츠”나 “릴스”같은 것들이지요. 밝음은 우리가 어둠을 외면하고 찾아 나선다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우리가 고통을 외면한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빛이 상징하듯, 우리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영화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숨쉬듯 쉽게 은총의 삶을 살게 됩니다.
빛과 어둠, 찬양과 도피, 경이와 고독이 교차하는 혼란스러운 탄생의 순간이 바로 <거룩한 밤>입니다. 거룩의 꽃은 폐허 속에서 피어납니다. 절망 한 가운데, 두려움에 떠는 이들 앞에 빛으로 우리 주님은 오시고, 간절하게 부르짖는 이들과 함께 있어 주심으로 구원을 맛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과 이미지를 상상하며 함께 묵상합시다.
• 나는 지금 창 너머의 등 돌린 사람처럼 어둠을 외면하고 밝은 곳만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외면하고 있는 폐허, 고통받는 이웃은 누구입니까?
• "두려워하지 말라"는 천사의 음성이 내게 임할 때, 나는 요셉처럼 잠에서 깨어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습니까?
손 모아 기도합시다.
폐허 한가운데 빛으로 오신 임마누엘, 오늘도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이들과 함께 계셔 주소서.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절망하는 이들 곁에 함께 있어주는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술 묵상 필자 소개:
노용환 목사는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학부)과 실천신학(신대원)을 공부했다. 예배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교회 이콘과 상징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뉴욕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블렌튼필 인스티튜트에서 상담학을 공부했고, 센트럴신학교 목회학박사과정을 통해 선교적 교회를 연구중이다.
200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2017년부터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 이중 소속으로 로드아일랜드 제일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생명문화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했고, JOYFUL COOP(신나는 협동조합) 발기인 대표로 서류미비 싱글맘 렌트 지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미주 뉴스앤조이 기자로 활동하며, 선배기자들로부터 글쓰기를 배웠고, 실용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가구나 오래된 그림처럼 무용(無用)하고 예쁜 것을 좋아한다. 또한 자전거와 캠핑 그리고 비치 라이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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