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환의 예술묵상] 브뤼헐의 “동방박사의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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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ration of the Magi
동방박사의 경배, 1617-1633, 피터 브뤼헐 2세 (the Younger)
에르미타주 미술관 (St. Peterburg, Russia)
눈 덮인 하얀 마을입니다. 어른, 아이, 동물 할 것 없이 모두 분주합니다. 그 안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동방 박사들과 일행들이 틈새에 담겨 있습니다. 작가는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는 동방 박사들의 그 장엄한 경배의 풍경을 베들레헴으로 국한하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던 나그네의 시선에 담길 법한, 눈 덮인 플랑드르의 평범한 마을에 이 장면을 넣어 봤습니다. 성탄의 영적 사건이 발생하는 곳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입니다.
먼저 화면 중앙에 소박한 동네와 대비되는 장식이 돋보입니다. 금실로 장식된 페르시아 카펫이 얼마나 걸었을 지 모를 노새 두 마리 등에 덮여 있습니다. 더 멀리 마을로 들어오는 관문 통과하는 노새 일행이 더 있습니다. 상당한 규모의 <별빛 관찰단>입니다.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마침내 그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마태 2:9) 복음서에 기록된 이 긴 여정의 마지막 순간이 이 마을 한복판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들은 어디 있을까요? 그들이 선 곳이 바로 별이 멈춘 곳이자, 아기가 있는 곳이겠지요. 바로 왼쪽 하단의 눈 덮인 헛간입니다. 여관인지 마굿간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여기에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께서 누워 계십니다. 연분홍빛, 그리고 황금빛 외투를 입은 동방 박사는 벌써 엎드려 경배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혈통의 동방박사도 곧 경배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대여섯 사람 정도 줄지어 경배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장엄하지 않습니다. 주제와 그림이 일치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오랜 세월, 작가들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을 맞이하고 경배하는 이 순간을 그려왔습니다. 초창기부터 인기있던 등장인물은 동방 박사였습니다. 왕을 고관 대작이나 왕이 경배한다는 컨셉을 좋아했습니다. 몇 세기가 지나 목자들도 등장할 정도로 문턱이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너무합니다. 예수님께서 임마누엘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데… 이다지도 관심들이 없을 수가 있을까?
사실 이 부분이 브뤼헐의 통찰입니다. 이국적인 여행객 일행에도 호들갑 떠는 사람 하나 없는 마을, 경배하는 동방박사들을 둘러싸고 탄성지르는 등장인물 1,2,3이 없는 작품입니다. 아이들은 그저 얼음을 즐길 뿐이고, 누군가는 물을 길어옵니다. 무심히 그날 하루를 근근히 버틸 땔감을 얻으려는 주민, 강아지와 눈밭을 거니는 사람, 전체적으로 추운 날인 것인지 한껏 움츠리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일상의 리듬> 안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신의 아들이 왔으니 모두 멈추고 경배하라는 입장이 아닙니다. 신성함과 일상은 분리될 수 없고, 한 풍경 안에 공존한다는 작가의 세계관이 이 작품을 통찰력있게 만들었습니다.
동방에서 높으신 양반들이 왔고, 진귀한 예물을 준비했다 한들, 작가는 그들을 클로즈 업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예물을 전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멀리서, 마을 전체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나그네의 시선이기도 하지만, 이제 보니 자식을 인간계로 내려보낸 아버지 하나님의 시선 같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처럼 페르시아 양탄자보다 더 고운 백설의 지붕이 이 마을에는 있습니다. 높고 화려한 것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낮고 소박한 것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이들 모두와 함께 하시고자 임마누엘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이 작지 않은 고장이듯, 플랑드르의 이 마을 또한 작지 않은 고장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나라요, 자녀들이 가꾸어 나가는 터전입니다.
작은 반전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가에 모여 온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추워서 빨리 집에 가자는 사람들보다는 적극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밝히시고, 연약한 이들을 고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고, 온기로 보듬어 안아주실 분은 바로 그 옆, 한산하고 서늘한 구석, 헛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추운 세상에서 작은 온기라도 찾는 이들은 하늘에 속한 불을 던지러 이 세상에 오신 예수의 신비로 이끌리며, 초대받고 있습니다.
말씀과 이미지를 상상하며 함께 묵상합시다.
• 나는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나의 '일상의 리듬' 안에서 얼마나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신성한 것과 일상을 분리하며, 특별한 순간에만 하나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 나는 지금 세상의 작은 온기를 찾아 불가에 모인 사람들처럼, 하늘의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의 신비로 적극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추위를 피해 빨리 지나가려고만 하고 있습니까?
손 모아 기도합시다.
주님, 화려한 예물과 장엄한 경배보다 눈 덮인 일상 속에서 당신을 만나게 하소서. 한산하고 서늘한 구석, 낮고 소박한 곳에서 태어나신 당신의 신비 안으로 저를 이끌어 주소서.
예술 묵상 필자 소개:
노용환 목사는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학부)과 실천신학(신대원)을 공부했다. 예배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교회 이콘과 상징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뉴욕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블렌튼필 인스티튜트에서 상담학을 공부했고, 센트럴신학교 목회학박사과정을 통해 선교적 교회를 연구중이다.
200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2017년부터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 이중 소속으로 로드아일랜드 제일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생명문화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했고, JOYFUL COOP(신나는 협동조합) 발기인 대표로 서류미비 싱글맘 렌트 지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미주 뉴스앤조이 기자로 활동하며, 선배기자들로부터 글쓰기를 배웠고, 실용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가구나 오래된 그림처럼 무용(無用)하고 예쁜 것을 좋아한다. 또한 자전거와 캠핑 그리고 비치 라이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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