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환의 예술묵상] 헬더르의 “그리스도의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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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ptism of Christ
그리스도의 세례, c.1710, 아렌트 더 헬더르
더 피츠윌리엄 뮤지엄 (캠브리지, UK)
그리스도의 세례, 수많은 작가들이 도전했던 작품명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 어딘지 남다르고, 수상합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과 같은 당연직(?) 등장인물을 제한다면, 세례의 중심 소재는 물입니다. 그런데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물을 물처럼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램브란트의 마지막 제자는 ‘키아로스쿠로’라고 불리는 강렬한 명암 기법에 미니멀리즘을 덧입혔습니다. 소재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상상력의 확장을 유도하지 않습니다. 물은 실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강에서 무릎 꿇고 계시는데도 물은 찰랑찰랑 수위가 늦습니다. 요한이 떨리는 손으로 물을 떨어뜨립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로 물줄기가 흘러 내립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빛이 내립니다. 실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물뿐이 아닙니다. 성령이 희미하게 원반의 중심에 십자 모양으로 실재합니다. 날개 치며 내려오시는 것인지, 올라가시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실재합니다. 빛과 날갯짓과 앝게 흐르는 물소리가 조화를 이루고, 하늘과 땅이 연결된 이 순간에 소리가 광야를 보듬어 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늘의 음성입니다.
미니멀한 작품의 중심 기둥을 살펴봤으니, 이제 주위를 둘러봅니다. 사람들이 모여 서 있습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 푸른 두건을 쓴 사람, 지팡이를 짚은 사람, 선 사람, 앉은 사람 모두 제각기지만, 시선은 한 곳, 빛의 조명이 비추는 곳을 보고 있습니다. 성령의 날갯짓을 감지하고는 모두 경외감에 휩싸입니다. 역사적 사건을 넘어, 신의 낮아지심과 비우심을 목도한 <증인의 무게>로 모두 얼어붙은 듯 정지합니다.
하늘 문을 여는 열쇠는 때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섭니다. 요한은 애초에 선생님께 세례 드리는 것을 극구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 하시는 대로 따랐습니다. 순종이 이성보다 낫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이 하늘뜻에 따른 요한은 세례자라는 칭호로, 예수는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칭호로 영광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물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빛은 머물러 있었습니다. 작가는 그 순간을 붙들어두는 사람입니다. 어둠과 빛이 맞닿은 경계를, 신이 인간에게 무릎 꿇는 찰나를, 겸손과 영광이 교차하는 그 지점을. 화폭에 새겨두었습니다. 물은 낮았지만 하늘은 높이 열려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릎을 꿇고 계셨지만 하늘의 음성은 그를 아들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1710년, 네덜란드의 늙은 작가가 붓을 들었습니다. 스승 렘브란트가 세상을 떠난 지 사십 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화가는 스승과 함께 탐구했던 그 빛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빛에 감싸여 영광의 순간을 맞이한 수많은 세례자들과 함께 여전히 길을 걷고 있습니다.
말씀과 이미지를 상상하며 함께 묵상합시다.
•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넘어설 때, 나는 요한처럼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는 음성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내 삶에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순종했을 때 하늘이 열렸던 경험은 무엇이었습니까?
• 이 작품에서 물은 실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고, 성령도 희미하게 실재합니다. 내 신앙 안에서 분명히 실재하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실재를 어떻게 증언하는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손 모아 기도합시다.
하늘 문을 여시는 주님, 당신께서 무릎 꿇으실 때 하늘이 열렸고, 낮아지실 때 영광이 임했음을 고백합니다.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순종하게 하시고, 보이지 않는 실재 앞에 경외하며, 빛과 어둠이 맞닿은 이 세상에서 당신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예술 묵상 필자 소개:
노용환 목사는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학부)과 실천신학(신대원)을 공부했다. 예배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교회 이콘과 상징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뉴욕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블렌튼필 인스티튜트에서 상담학을 공부했고, 센트럴신학교 목회학박사과정을 통해 선교적 교회를 연구중이다.
200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2017년부터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 이중 소속으로 로드아일랜드 제일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생명문화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했고, JOYFUL COOP(신나는 협동조합) 발기인 대표로 서류미비 싱글맘 렌트 지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미주 뉴스앤조이 기자로 활동하며, 선배기자들로부터 글쓰기를 배웠고, 실용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가구나 오래된 그림처럼 무용(無用)하고 예쁜 것을 좋아한다. 또한 자전거와 캠핑 그리고 비치 라이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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