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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의 영혼의 밤] 3장 육신의 문제와 통증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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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황장애 

    안나는 공황장애로 인한 도박중독에서 해방된 유명 기독인인 러시아의 대문호 《죄와 벌》 작가 도스토옙스키(1821-1881)와 재혼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십대 후반에 부친이 농노로부터 살해당한 소식을 듣고 처음 공황장애에 시달렸다. 그는 33세에 사회주의 운동으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된 뒤 사형선고를 받고 4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책이라고는 성경만 허락된 그곳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기독교 인도주의로 거대한 방향 전환을 경험한다. 병약한 그가 비범한 재주를 보인 것은 소설 창작이었다. 그러나 창작 시 유발되는 불안과 엄청난 스트레스를 그는 도박으로 풀어 갔고, 결국 도박중독에 깊이 빠져든다.


    토스토옙스키는 46세에 속기사 출신인 20세의 안나 스기트기나와 재혼한다. 안나는 남편의 무분별한 경제관념, 도박중독, 공황장애, 대책 없는 시집 식구, 전처소생 두 아이, 그리고 자신이 낳은 세 아이를 잘 건사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중독에 빠진 채 무능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자책하고 자학하면서도 더 깊이 도박에 빠져드는 악순환 속에 긴 영혼의 밤 속을 걸어갔다. 안나는 남편이 선불로 고료를 받은 《백치》를 쓰기에 모스크바가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간파하고 스위스로 가던 중에 바덴바덴에 들린다. 도스토옙스키가 룰렛에 뛰어들어 가진 돈을 다 탕진하자, 안나는 범인(凡人)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을 취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폐물을 팔아서 남편이 도박을 계속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도스토옙스키의 눈에서 거대한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비로소 젊은 아내와 태중의 아이가 자신의 방탕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육신을 대면했고 공황장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안나는 비상한 수완으로 출판사를 차려 경제적 독립을 이루었고, 토스토옙스키는 최후의 걸작인 《카라 마조프의 형제들》을 탈고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81년 1월 28일, 토스토옙스키는 안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폐동맥 파열로 60년의 생을 마감한다. 시베리아 감옥에서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처음 읽었던 그 성 경책을 가슴에 안은 채였다.


    한 여인의 진실한 사랑을 통해서 그 남편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었다. 상담학의 기초도 배우지 않았던 안나였지만 영민한 그녀는 극진 한 헌신으로 도박 뒷돈을 줘서 남편으로 하여금 ‘육신의 마지막’을 보도록 인도했다. 그것은 엄청난 용기였으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다. 만일 그녀가 남편의 도박을 강제적으로 금했더라면 끊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그는 공황장애의 덫에 평생 매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박중독에 있는 이에게 동일한 처방이 통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공황장애는 이성적인 논리로는 조절이 힘든 병이다. 그의 도박중독은 공황장애의 후유증을 풀기 위한 중독이기 때문에 공황장애가 그치자 도박중독도 멈추었다. 


    필자의 아내 역시 오랜 세월 공황장애에 시달렸다. 다음은 아내의 고백이다. 


    “숙제의 의미를 몰랐던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그날 나는 혼자 칠판 앞에 서 있었고 선생님이 나의 목을 조르셨던 것 같다. 어쩌면 목을 조르는 시늉만 하셨는지도 모른다. 숙제를 하지 않았기에 선생님은 나더러 아이들이 앉아 있는 의자 사이를 기어가라고 하셨고, 아이들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기어가는 나의 엉덩이를 때렸다. 장난삼아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때리는 시늉만 했을 수도 있다. 나는 울지 않았고 부끄럽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혼돈 가운데 그냥 지나쳐 버렸지만 그 이후 나에게는 급격한 공황장애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기 전만 해도 나는 적극적인 아이였다. 막내딸로 아버지의 귀여움을 사는 아이었다. 인쇄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께 온갖 재롱을 부리며 자란 나는 가족들에겐 완고하시고 두려운 존재였던 아버지를 언제나 환히 웃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자랐다. 예쁜 색동 한복을 입고 결혼식 화동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마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친지들의 시선을 즐기면서 꽃잎을 뿌리며 걸어가다 중간 지점쯤에서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지으시던 아버지와 눈을 맞추며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런 내가 초등학교 때 처음 경험한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내 안에는 나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정도의 큰 잘못을 했다는 인식이 마음속 깊이 각인되었다. 나는 스스로 비정상적인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잃어 갔다. 그때부터 공황장애가 서서히 드러나더니 굳건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일상이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사람이 두려웠다. 2학년 때부터는 일주일 혹은 두 주 일씩 학교에 가지 않고 온종일 이곳저곳을 배회하다 저녁이 되어 귀가하곤 했다. 사람들 앞에서 책을 읽거나 말을 하면 공황장애 증세 때문에 호흡이 가빠지고 숨이 막히며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럽고 말이 떨리는 신체적 증상이 공포, 불안 등의 심리적 증상과 함께 밀려왔다. 부모님은 귀여운 막내딸이 기죽지 않도록 단 한 번도 야단치시지 않고 충분히 사랑해 주셨기에 가족과 친지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밝고 명랑한 아이로 자랐다. 하지만 겉으로만 아무렇지 않은 척 흉내낸 것일 뿐, 사실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떨고 있었다. 어느덧 나는 이중적 삶에 익숙해졌고, 그럴수록 나의 자존 감은 점점 낮아져만 갔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공황장애는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수없이 기도와 감사 찬양을 해보았지만 한번 뿌리 내린 공황장애는 쉬이 사라지지 않고 삼십 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믿음이 부족해 공황장애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정죄감 때문에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공황장애가 엄습해 올 때마다 뱀에게 목이 감긴 듯 숨 막히도록 절박한 긴장 상태가 불식간에 터져 나왔다. 수십 년간 공 황장애에 시달리며 나의 건강은 서서히 악화되었고, 언제부터인가 비로소 그것이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계속>


    성경적 상담 세미나 문의: isaya5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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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이민 

    1981년 오하이오주립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1년 정년 후 해외 직장생활을 접고 36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

    삼성물산 고문을 지냈으며,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산학협력교수,

    현재는 한동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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