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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의 영혼의 밤] 3장 육신의 문제와 통증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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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의 부인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편집자주]


    다음 날 나는 그 책 중에서 빌리 그레이엄의 《하나님과의 평화》 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코 완전하거나 조건없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예리한 지적은 나의 마음을 관통했다.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있었기에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절박한 고백이 저절로 나왔 다. 다음 장에서 나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피 흘려 돌아가신 것을 차근하게 풀어 나가는 대목을 읽을 때의 느낌은 ‘경악’ 그 자체였다. 눈물이 흐르고 또 흐르는 가운데 감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의 삶은 주님을 향해 조금도 주저함 없이 돌아서게 되었다. 예수님이 인간처럼 인격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과 그러한 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친히 찾아오셨다는 것이 현실로 받아들여지니 갑자기 깊은 잠에서 깨어나 눈이 번쩍 뜨인 것처럼 모든 것이 깨달아지며 새로웠다. 이상한 것은 기독교 고등학교를 다녔을 뿐 아니라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도 하며 무수히 들었던 예수님에 대해 그 때까지도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분이 누구인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영의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다. 1978년 6월 10일. 내 생애 가장 귀한 날이었다. 그 후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고 매일 묵상하며 진리의 말씀에 놀라고 깊이 잠기기 시작했다. 아침에 조그만 일을 생각만 해도 저녁이 되면 그 일이 이루어지곤 했다. 초신자인 내가 감당하기 벅찬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성령충만함이었다. 어떠한 갈등도 주님께서 인도하실 것임을 믿고 기다릴 수 있었고, 감사와 평안한 마음이 나의 삶을 주장했다. 교회 식구들도 나의 급격한 변화에 놀라워하며 곧바로 교회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바우어즈 씨의 전도로 믿음을 가졌기에 전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심으로 전도했고 곧 결실도 따라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성경 말씀에 잡혀 무엇이나 거절하지 않고 전도와 봉사 중심으로 일상을 매진했다. 가정생활 외에 성경 공부, 육아반 인도와 금요 철야기도 등으로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그러다 첫 아들을 출산한 뒤로는 감동과 기쁨이 엷어지고 차츰 영적 열정이 식어 가고 있었으나 짐을 내려놓는 법을 몰랐다. 갑자기 그만두면 주위 사람을 실망시키고 혹 예수님께 누를 끼칠까 두려워 솔직할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이런 문제를 의논하면 목사님이나 신앙 선배들은 질색을 하며 시험에 들겠다고 염려했고, 그럴수록 나는 오히려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여전히 밖으로는 분주하게 활동했으나, 서서히 혼자만의 골방으로 숨어들어가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러한 현상은 곧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 받으려 하는 육신의 문제였다. 주위 사람들이 나의 힘든 상황을 이해해 주기를 수동적으로 기대했고,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 해 나는 우울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결혼 전 나의 친정 엄마는 자식들의 마음을 미리 감찰하셔서 필요한 것을 요구하거나 부탁하지 않아도 채워 주시며 과잉보호하셨다. 공황장애 속에서 공주 아닌 공주로 성장한지라 아무것 아닌 일에도 힘에 겨워 병이 나기 일쑤였다. 급기야는 그토록 달고 오묘 했던 기도와 성경 묵상조차 멀리하게 됐으며, 삶의 의미와 의욕을 상실한 심각한 패시비티 속으로 빠졌다. 어쩌면 죽음만이 나를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극단의 생각에까지 달했다. 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휴스턴으로 이사한 지 두 해 째 되던 해였다. 어쩌면 뇌종양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친한 의사를 찾아 진단을 받기도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이상이 없으니 우울해 야 할 이유도 없고 더 이상 무슨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비로소 주님께 완전 항복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실은 그 동안 두려워서 드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만일 주님께 다 드리겠다고 결단하여 목사 사모나 선교사로 가라 하시면 이미 힘든 사역이 더 힘들어지며 가정의 영역까지 없어져 버릴까 두려웠다. 


    나의 유년시절 우리 집은 항상 손님들로 북적였고 모친은 늘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며 사셨다. 늘 대문이 열려 있어서 일꾼과 손님들 때문에 분주했고 준비한 음식을 갑자기 닥친 손님들에게 양보하느라 정작 가족들은 굶거나 누룽지로 끼니를 때우며 늘 허기에 주렸던 친정이었다. 자그마한 나만의 공간도 없었다. 어린 마음에 가진 꿈은 가난한 농부의 아내가 되어 오붓한 가족의 공간을 가지고 사는 것이었다. 가족보다 타인 위주로 살던 모친 같은 삶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며 자랐다.


    가족의 영역까지 포기한 채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은 내게 ‘죽음’ 자체를 의미했다. 그것만은 버리지 않기 위해 나름 열심히 사역을 하고 싶었지만 영적소진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까지 포기하고 헌신한 후 믿기 어려운 변화가 따라왔다. 나의 육신을 직시하고 난 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보여주신 것은 놀랍게도 사모나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나의 기본 영역을 지켜 보호해 주실 뿐 아니라 각자의 가정을 지키는 것이 죄가 아니고 주님의 뜻임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동안의 시달렸던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육신 때문이었으며 특히 패시비티가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보여주셨다. 기다릴 때와 순종해야 할 때 그리고 싫고 좋고를 선택해야 할 때 솔직한 자기 의사를 ‘사랑’으로 표현하도록 훈련시켜 주시며 건강한 자신감을 조금씩 회복시켜 주셨다. 마침내 나는 7년간의 긴 우울증에서, 그 캄캄했던 영혼의 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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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이민 

    1981년 오하이오주립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1년 정년 후 해외 직장생활을 접고 36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

    삼성물산 고문을 지냈으며,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산학협력교수,

    현재는 한동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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