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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의 영혼의 밤] 제2부 제1장 십자가의 비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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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죽으심은 대표적인 수동적 타살이다. 

    주님은 충분히 죽음을 벗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는데도 수동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셨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철저히 타살이다(갈 5:24).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면 우리가 능동적으로 취할 수 있는 어떠한 여지가 전혀 없다. 심지어 자살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 십자가다.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는 세 개의 못과 망치가 필요하다. 못 하나는 스스로 박을 수 있지만 나머지 두 개의 못질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일차적으로 백성들이 합심해서 사탄과 일을 꾀했고 로마 병정들이 못질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타살이었다. 반대로 체념은 능동적인 포기이기에 자살이고,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는 철저히 구별되며, 스스로 포기하는 능동적인 죽음이므로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한 죽음이다.


    사방이 막히고 도저히 살 소망마저 끊어져서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내용이 극명하게 다른 두 가지 죽음을 가지고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로 자살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육신이다. 절망은 육신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모양의 능동적인 역할도 다 소용이 없다는 결론이지만, 체념은 육신이 과감히 행사하는 마지막 마무리다. 체념은 죽음에 이르기 전에 육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통렬한 한방이기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능동적으로 십자가 상의 죽음을 막아 보려는 마지막 육신의 노력이고 마지막 저항이다. 그래서 체념은 해탈의 경지 다음의 높은 수준으로 취급되고 급격히 마음의 고통을 줄여 준다. 통증을 경감하기 위한 목적으로 체념만큼 역동적 인 것이 없다. 


    2007년 골든 글로브 감독상을 받은 영화 “잠수종과 나비”는 프랑스 최대 패션잡지 “Elle”의 편집장 쟝 도미니크 보비의 수기에 근거를 둔 실화다. 세상에 전혀 부러운 것이 없고 수많은 여인에게 둘러 싸여 성공을 만끽하던 도미니크는 갑자기 찾아온 뇌출혈로 전신마비가 되었고 오직 왼쪽 눈만 깜박일 수가 있었다. 그는 처절한 속박 속에서 20만 번의 눈 깜박임으로 130페이지에 달하는 수기를 써내려 간다. 이 영화는 뇌졸중으로 인한 전신마비 환자의 인간 승리를 그려 냈지만 필자의 눈에는 절망의 늪에서도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 인간의 상상력에 매달리는 실례를 치밀하고 담담히 그려 낸 것으로 보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왼쪽 눈의 깜빡임으로 소통한 첫 문장은 선지자 엘리야의 고백과 동일한 “죽고 싶다”(왕상 19:4)였다. 두 사람 다 원치 않는 절망의 순간에 빠졌다. 언어치료사가 알파벳 a, b, c를 읽을 때 해당하는 알파벳에 그가 왼쪽 눈을 깜빡여 반응하는 방식으로 극히 제한된 소통을 했다. 한정된 소통의 공간은 극한의 엘리야가 겪은 것과 동일한 절망의 벽이었다. 단 도미니크는 소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자 생존을 위해 인간적인 ‘상상력’으로 절망을 헤쳐 나가는 인간 본연의 연명 본능인 능동성과 독립성을 보여준다. 반대로 엘리야는 하나님의 제의에 대해 거룩한 수용을 보여주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신위적인 믿음을 살게 된다.


    상한 감정에 상처가 노출되면 이전보다 더 고집스럽고 더 예민해지며 끊임없는 공상의 세계로 빠져들고 생각이 많아져서 머리는 휴식 없는 거대한 발전소 터빈 마냥 중단 없이 돌아가고,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히 감지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우리의 감정의 저수지도 메말라 버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눈물까지도 사라지고 만다. 


    인생은 복수의 영혼의 밤을 맞이한다. 젊어서건 마지막 침상에 서건 우리는 영혼의 밤을 반드시 만난다. 키에르케고르처럼 “있는 힘을 다해서 절망하라”고 말할 만큼 예외 없이 영혼의 밤을 맞게 되고, 그 밤을 통해 절망에 이르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후의 삶의 질이 결정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영혼의 밤을 피할 수 있는가 보다는 영혼의 밤을 통해서 신위적인 믿음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의 밤은 신묘한 하나님의 세계를 살게 하는 교두보지만 영혼의 밤을 겪는 모든 이가 다 이 세계를 맛보는 것은 아니다. 극한 절망 안에서도 스스로의 방법을 선택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절망의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비켜가는 이유는 영혼의 밤의 한가운데 통증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우리의 육신은 통증을 없이 하는 효과적인 방책을 우리에게 사주하기 때문이다. 상상력, 공상, 판타지는 가장 쉽게 통증을 잊게 하는 육신이다. 하나님께서 통증을 잊게 하는 ‘인본적(육신적) 상상력’을 금하신 장면이 나오는 대목이 바로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이다.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 11:6).


    여기서 ‘하고자 하는’이라는 단어는 개역 한글판에서 ‘경영’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통증을 잊게 하는 ‘상상력’을 말한다. 그들은 가장 쉽게 홍수라는 통증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으로 홍수를 이기는 거대한 탑을 쌓은 것이었다. 가인이 쌓은 성과 일맥상 통한다. <계속>


    성경적 상담 세미나 문의: isaya5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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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이민 

    1981년 오하이오주립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1년 정년 후 해외 직장생활을 접고 36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

    삼성물산 고문을 지냈으며,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산학협력교수,

    현재는 한동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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