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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윤리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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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윤리와 평화의 추구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교우들, 그리고 교우들의 자녀들이 전장터를 향하고 있다. 후방의 부모와 친척의 애타는 간구에도 상관없이 전쟁터에 있는 군인의 선한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쟁터의 당사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살상하고 부상을 입히고 있다. 이때에 우리는 전쟁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신앙적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였던 전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규정되었다. 서구에서 전쟁론의 대가라 하는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기념비적인 저서 「전쟁론」(On War)에서 전쟁을 “적으로 하여금 아측의 의지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힘의 행동”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클라우제비츠에게 있어서 전쟁은 “국가정책의 연장”이었고, 이는 국가의 외교와 함께 국익을 증대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이처럼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본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는 서구를 전쟁의 빈발과 비인간적 대량 인명살상과 파괴로 이끄는 요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내려온 동양적인 전쟁술의 고전인 「손자병법」에서는 전쟁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손자에 의하면, 전쟁은 군중의 생사가 결정되는 분기점이자 나라의 존망에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전쟁은 차선이었으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아울러 전쟁은 속임수라고 보면서 전투원의 섬멸을 통한 무모한 전승보다는 상대의 교전 의지의 마비를 목표로 한 양동, 심리전, 기습, 포위, 차단, 우회 등이 전쟁의 기술로 자주 사용되었다.

    전쟁의 섭리적 이중성
      그러나 전쟁의 개념이 어떠하든 현상적인 면에서의 전쟁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대규모적 살인과 장애의 발생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 사이의 의지의 격돌과 신체의 마모와 손상을 보며, 피해 가족의 절규와 전투원간의 윤리의 망실, 물질문명의 손상과 무형문화의 파괴를 발견한다. 전쟁은 불가피하게 대규모의 살상과 파괴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것을 감추기 위해 전쟁을 미화시켜 왔다. 대량 살상무기인 전폭기를 “자유의 투사”라고, 자살특공대를 “가미가제”(神風)로, 그리고 러시아와 독일군 6,000명이 한꺼번에 죽은 탄넨베르그의 대회전을 “추수일”이라고 핵미사일을 아기사슴 밤비(bambi)로 수식하였다.  
      국가의 미화와 수식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 대한 훼손”이다. 이는 “살인하지 말라”(출 20:13, 신 5:17, 마 5:21)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반역이다. 그러나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를 통하여 죽이고, 헐며, 찢고, 미워하며 전쟁할 때가 있다(전 3:1-8)고 말하면서 이 비극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으시고 이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전 3:11)고 말하였다. 실제로 하나님은 용사가 되시어 전쟁에서 직접 싸우시고, 혹은 용사들을 세워서 전쟁터에 보냄으로 전쟁에 간접적으로 개입하셨다. 그는 친히 이집트의 강군을 격파하시고 여리고와 아이성의 정복전쟁에 앞서 가셨으며, 산헤립의 18만 5천의 군대를 자신의 천사들로 일시에 섬멸하셨다.
      전쟁은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역사운영 방식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환란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눈곳간과 우박창고를 예비(욥 38:22-23)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해 나라와 민족을 심판하시며 처벌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 새로운 민족을 지상에 세우시고 장군과 군벌과 정복자를 통하여 새로운 문명을 후원하여 세우게 하신다. 전쟁을 통한 한 민족사의 종결과 새 역사와 문명의 발흥은 필요악을 사용하여 자신의 통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적 이중성이다.  

    전쟁참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입장.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이중성은 전쟁의 참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각기 다른 다음의 세 가지 입장을 낳는다. 첫째로 행동주의(activism)는 전쟁에 대한 참여주의적 입장인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전쟁 참여가 옳으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입장이다. 이는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한다”는 입장에서 국가의 징병과 전쟁수행을 위한 요청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한 참여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 참여는 국가의 결정이며, 성도는 자기 보호와 악에 대한 징계의 수단으로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이 행동주의적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의 근저에는 악한 침략자에 대하여 싸우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 것 보다 더 악한 것이요, 전쟁 회피는 악과 싸우시는 “용사이신 하나님”(God the Warrior)이 주신 “용사인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둘째로 전쟁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입장은 평화주의(pacifism)이다. 이는 초대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이 군복무 거부로 죽은 병사를 순교자로 표현하고 있는데서 보여주는 입장인데, 1930년대, 구미에서 재세례파나 극단적 근본주의적 경향을 가진 그리스도인에 의하여 지지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명령 때문에 어떤 종류의 전쟁에도 참여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이들은 살인 금지의 하나님 명령을 어기는 전쟁이라는 형제살인에 참여할 수 없음을 단언한다. 아울러 악에 대하여 힘으로 대적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산상수훈이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론을 거부하고 있으며, 전쟁은 실제 역사상에서도 항상 옳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전쟁이 탐욕의 소산이며 많은 악의 연원일 뿐 아니라 결코 사랑의 구현수단이 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셋째로 선별주의(selectivism)란 전쟁의 수행이 때에 따라서는 보다 작은 악에 속한다고 생각하면서, “고통스런 참전”(agonized participation)을 인정한다. 선별주의자들은 국가의 정책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상황을 면밀히 재검토한 후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전쟁에 대하여만 참여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정당한 전쟁이라는 이론적 토대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정당한 전쟁의 조건
      정전론(正戰論, Just War Theory)이란 4세기 암브로스와 어거스틴에 의하여 발전되고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체계화되어 구교와 종교개혁자들의 대부분에 의하여 승인된 전쟁론이다. 특히 개신교의 대표적 선언인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병사로서 “정당한 전쟁에 출전”하는 것이 인정되었고, 1647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소명에 응하여 “정의와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여야 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에 전쟁을 감행”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하였다.
      정전론은 신자의 전쟁참여를 인정한 교회의 공식적인 선언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정당한 것은 아니며, 전쟁은 칼의 권세를 부여받은 정부가 정의로운 방법으로 선량한 사람을 지키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수행할 때만 정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당한 전쟁이 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자주 논의되었다. 첫째로 먼저 군사력은 의도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하되 이마저도 분명히 합법적인 권력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한다. 둘째, 전쟁은 선을 발전시키거나 악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어야 한다. 셋째, 전쟁은 단지 최후적인 수단으로써 행해져야 한다. 넷째, 전쟁으로 인해 얻어질 수 있는 선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악보다 커야 한다. 다섯째, 전쟁수행의 노력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성공이 기대되어져야 한다. 여섯째, 전쟁은 국제적으로 협약된 전쟁규칙에 따라 행해져야 하며, 특정한 도덕적 제한을 절대 넘어서는 아니된다. 일곱째로, 비군사지역에 대한 공격, 불필요한 파괴, 약탈, 그리고 학살 등의 해가 있어서는 아니된다.

    핵무기와 평화의 추구
      현대전은 방사능무기, 생물학무기, 그리고 화학무기를 동반한 인류와 생태계의 파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핵무기와 핵투발 수단 및 전자전 장비의 발전은 재래전의 개념을 총체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인간 스스로가 가지고 행사하는 살상능력은 이제 가공할 단계에 이르러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전쟁을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핵무기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살상하여 인종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 자체를 파멸시킬 만한 상호 공멸의 실제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포스런 현대전의 전망 속에서 평화의 추구는 이제 상투어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의 중립선언이나 그리스도인의 도피적 반전운동이 평화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핵 위협 아래 있는 나라의 핵 억제력의 확보와 강력한 방위력이 평화를 추구하는 국가의 필요조건이 되었다.

      싸울 날을 위한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추구를 위하여 더욱 중요한 것은 전쟁의 주님 되신 하나님과 한 국가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며, 아울러 국가내의 가증한 범죄를 척결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도 전쟁에서 패배한 동서고금의 타락한 국가는 한 국가의 영적 건강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적절한 평화추구의 수단이었음을 성경이 논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된 군대보다도 더 중요한 영적 군대이며 한 나라의 가장 믿을 만한 “병거와 마병”이다.

    작성일: 2003/3/29(토)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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