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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의 의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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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작성일2020-08-12 | 조회조회수 : 2,697회

    본문

    크리스천은 기본적으로 타락 전, 타락 후, 십자가 이후를

    구분할 줄 아는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고 그것을 좋게 보셨다.

    그분은 전능하시며 절대적으로 선하시며 무한히 지혜로우시다.

    그 분이 만든 피조계가 악하거나 추하거나 부족할 리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타락 전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노동도 마찬가지다.

    타락 전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대리하는 통치자로서 피조물들을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돕는 것이 아담의 노동이었다.

    왕이 자기 먹을 것을 걱정하느라 백성들의 삶에 소홀해진다면 넌센스다.

    그래서 통치자인 왕에게는 삶의 모든 자원이 제공된다.

    오직 통치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타락 후 노동은 저주로 인해 그 의미가 바뀌었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3:17b).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3:19a).

    타락 후 노동은 전적으로 먹고 살기 위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먹고 사는 일에 약육강식, 즉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게 되었다.

     

    아담의 죄를 속죄받은 크리스천에게는 다시금 타락 전 노동의 의미가 회복되었다.

    내가 여러 글에서 밝혔지만 에베소서 121절에서 23절까지의 교회 그림에서

    통치자이신 예수님이 머리로 계신다. 그 분의 몸으로 교회가 있다.

    몸 된 교회의 발 밑에 다른 피조물들이 있다.

    이 피조물에는 에덴과는 다르게 불신자가 포함된다.

    교회(성도)의 일 즉 노동은 주님 오실 때까지 생태계를 지키며

    피조물들의 '생육과 번성'을 돕는 것이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시는 것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이나 하는 짓이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타락 전 삶의 자원들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고 오직 피조물을 돌보는 일만을 했던

    아담처럼 크리스천들도 그리 해야 한다.


    크리스천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만나를 먹고 반석의 물을 마시며

    해지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멈춘 것(5:12)을 기억하는가?

    이제부터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먹이시겠다는 것이다.

    즉 소산을 거둘 수 없는 광야에서는 이적적인 방법으로,

    소산을 거둘 수 있는 기름진 땅에서는 일상적인 방법으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

    만나이건 소산물이건 그것들을 공급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만나와 소산물의 의미가 동일하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 믿기 전이나 후의 우리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다.

    어떤 사람은 학교에 다니다가 예수를 믿고 여전히 학교를 다닌다. 그러다 보니

    정확히 무엇이 바뀌었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저 예전에는 교회 출석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하고 있는 정도다.

    그나마 처음에는 구원받은 감격이라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3년이 못 간다.

    시간이 갈수록 그마저도 희미해지고 이전과 전혀 변화없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직장인도 마찬가지고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히 노동으로 땀을 흘리며 먹을 것을 얻던 사람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밥을 먹기 위해서 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의 의미 전환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식당을 운영하던 사람을 생각해보자.

    예수 믿기 전 노동의 첫째 목적은 생계유지였다.

    예수 믿은 후에는 그 목적이 전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 내 식당에 오는 사람들이 내 음식을 먹고 지친 심신을 회복하고

    생명의 에너지를 얻고 가는 것이 내가 식당을 운영하는 최우선 목적이 되어야 한다.

    생계유지는 그것에 저절로 따라오는 지극히 부차적인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가수들은 받은 달란트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소성시키는 것이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돈을 벌고 인기를 끌고 유명해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도적질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회복된 노동을 위해 달란트를 주신다.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청지기다.

    그는 달란트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바로 깨달으면 '사명자여 오라', '주를 위해 죽으러 가자'는 식의

    공산당 같은 선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올바로 성장한 사람들은 삶 자체가 생산적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안에서 바로 교육받고 성장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는 모든 것을 놓치고 잃어버렸다.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 세계관이 교회를 장악했다.

    그래서 경영학 공부도 안 한 목사들이 경영 기법들을

    교회로 끌어들였다.

     

    경영학 전공자로서 나는 경영학과 신학이 얼마나 대척점에 서 있는지 잘 안다.

    이 둘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절대 함께 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도 글을 쓸 예정이다.

     

    경영학도 모르고 신학도 모르는 목사들이

    목회에 '효율성' 개념을 도입한다.

    나중에 기독교 리더십을 비판하면서 지적하겠지만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는 [리더십의 용기]에서

    자신은 스탶들에게 탁월성을 요구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것이 얼마나 사탄적인 발상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런 사람을 벤치 마킹했다.

    그래서 교회는 사탄의 소굴이 되었다.

     

    회복된 노동의 의미와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섭리하시며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 목사들은 영적 아동학대를 한다.

    다시 말해서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영적 어린 아이들을 들들 볶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적 성인아이' '제자훈련 유감'을 다시 한번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목사의 탈을 쓴 어떤 사탄의 종들은 "멸치와 성도는 볶아야 제 맛"이라는

    끔찍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가차없이 저주했다.

    바울은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저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을 왜곡하거나 진리를 훼방하는 자들은

    하늘에서 내려 온 천사라도 저주한다고 했다(1:8).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이런 자들을 함께 저주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목사를 주신 이유의 첫번째가

    '성도를 온전케 하고'(4:12)

    그러면 그 결과로 성도들은 봉사의 일을 해서 교회를 든든이 세워가는 것이다.

     

    노동의 의미변화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끔찍한 부작용은 성도의 삶을 세상의 삶과 하나님 안에서의 삶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나는 '신앙생활'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천의 삶은 그냥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다.

    직장에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삶, 주방에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삶,

    학교에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생활 잘 하세요'라는 말은 크리스천에게 신앙생활 말고

    또 다른 삶이 있는 뉘앙스를 풍긴다.

     

    제발 아무나 목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재철 목사는 종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첫번째 모습이

    성직자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이라고 바로 지적했다.

    초월적 세계관을 가져야 할 종교가 세상의 것을

    탐하기 시작하는 것이 타락이다.

    그 결과 성직자의 사회적 신분이 인정받고 때로는 인기와 명예, 권력을 얻는다.

    이건 정확하게 사탄에게 절을 하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얻는' 모습이다.

     

    교인 수가 늘어난다고 좋아하지 말라.

    중세 천년을 기억하라.

    자끄 엘룰의 말처럼 크리스천이 한 사람이었을 때는 기독교가 존재했지만

    모든 사람이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 기독교는 사라졌다.

     

    교회라는 집단에서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외쳐 불러도

    그곳의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성경의 그 분들이 아니다.

    이것에 대해 나는 아마존을 통해 영어로 출판될

    Jehovah and his wife Asherah 에서 자세히 논했다.

    진정으로 고민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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