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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번째 나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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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작성일2024-03-05 | 조회조회수 : 46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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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선배 목사님 한 분이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로 한번 오라고 했습니다. 은퇴가 가까운 그 목사님은 자신의 서재에 있는 책 중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서 원하는 대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책 욕심이야 많지만, 이젠 저도 책을 모으기보다는 정리할 때가 되었기에 차일피일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미루다가 더는 미룰 수 없어서 지나는 길에 그 목사님 사무실에 들렀습니다. 한쪽 벽에 자리한 책장에는 수백 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습니다. 


    “이런 책도 보시네요. 어! 이 책은 저도 재밌게 읽었던 책인데….” 그렇게 책 이야기를 하면서 둘러보는데, 책들은 책꽂이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제 손에 잡히는 책마다 가져가라고 재촉하시면서 어떻게든 짐을 덜려는 눈치였습니다. 


    한참 동안 책 구경을 했지만, 여전히 빈손이었습니다. 과년한 딸 시집보내는 아비의 마음으로 책을 떠나보내려던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왜? 그냥 가려고!"라는 볼멘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책 하나만 가져갈게요.” 미안한 마음에 눈앞에 있던 책 한 권을 집으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체면치레로 들고 온 책이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는 제목의 수필집이었습니다. 


    제 책꽂이에 한동안 숨어 있던 이 책이 지난 주중에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수백 권의 책 중에서 뽑혀 왔는데, 지금까지 눈길 한 번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는 나무뿌리의 깊이에서 성장의 높이를 배우고, 줄기차게 자라는 나무줄기에서 살아가는 슬기를 배우고, 여러 갈래로 뻗은 나뭇가지에서 다 마찬가지라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하면서, 나무에게 인생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백송(白松)’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백송은 소나뭇과의 침엽수로 어릴 때는 푸르스름한 잿빛을 띠다가 차차 껍질이 벗겨져 하얗게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중에서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백송은 한국에서 가장 크고 나이가 많은 나무로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수백 년의 세월을 버티면서 통의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던 백송이 1990년 낙뢰를 맞아 쓰러졌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청와대 가까이에 있는 이 나무가 죽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여겨 나무를 살려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서울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나무 살리기에 애를 썼지만, 결국 고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백송은 1993년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밑동이 잘리면서 드러난 나이테를 통해 나이가 300살임이 밝혀졌습니다. 나무의 나이테에는 나이만이 아니라 나무가 자라면서 겪은 환경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좋은 환경에서 활발히 성장했을 때는 나이테의 간격도 넓습니다. 반면에 나이테의 간격이 좁다는 것은 그만큼 자라는 과정에서 숱한 역경을 헤쳐 나갔다는 말입니다. 


    이 나무의 나이테가 전하는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1919년부터 1945년 사이의 나이테 간격이 다른 해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민족이 겪었던 아픔을 나무도 같이 겪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어지러운 세월의 수상함을 감지해서 백송도 성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나이테에 남겨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나이테를 한자로 ‘연륜(年輪)’이라고 합니다. ‘연륜’은 나무의 줄기나 가지에 1년마다 하나씩 생기는 ‘둥근 테’라는 말이지만, 여러 해 동안 쌓은 경험에 의해 이루어진 숙련의 정도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연륜이 깊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연륜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연륜이 있습니다. 교회의 연륜은 역사가 오래될수록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려 웬만한 바람에는 넘어지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숙한 관계도 연륜 있는 교회에서 발견되는 전통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영역이 넓어지고,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와 더불어 하나님을 기쁨으로 예배하는 거룩함을 누리며, 받은 은혜를 나누며 세상을 섬기는 것도 연륜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제 다음 주면 우리 교회에 120번째 나이테가 생깁니다. 교회에 새겨진 120개의 나이테는 오랜 세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함께하셨음을 드러내는 증거이자 은혜의 흔적입니다. 나이테가 하나 더 늘어나는 만큼 믿음의 연륜을 지닌 성숙한 교회,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아름다운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창민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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