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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셉 라칭거와 한스 큉, 천국에서 부디 화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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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NEWS M| 작성일2023-01-02 | 조회조회수 : 4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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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선종에 부쳐 



    한스 큉(Hans Küng)과 조셉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 두 사람은 가톨릭 개혁의 토대를 만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이끈 스타 신학자였다. 30 대 중반의 두 신학자는 ‘교회의 본질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카를 라너)’을 만들어 내었다. 당시 라칭거는 1959년 본 대학교의 교수를 거쳐 뮌스터 대학교에 재직중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신학자 카를 라너를 좋아했다. 한스큉은 1960년 튀빙겐 대학 교수로 시작해서 같은 대학 명예 교수로 생을 마쳤다.


    라칭거는 2005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 활동하다가 2013년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생존시 사임한 경우는 극히 드문 예(역사상 5번째)로 표면상 이유는 건강문제지만 라칭거의 지나친 교회 중심 신학이 가톨릭의 외연확장에 장애가 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선출된 것이 일종의 반증이다. 


    1927년 생의 베네딕토 16세(조셉 라칭거) 전임교황이 지난해 31일 선종(善終)했다. 선종이란 말은 선생복종(善生福終)에서 나온 말로 이탈리아 출신의 선교사 로벨리가 1652년 베이징에서 간행한 한문 교리서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에 들어 있는 말이다. '선생복종정로'는 일상 생활에서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착하게 살다가 복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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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한스큉이 1928년생이고 2021년에 선종했으니 햇수로만 따지면 라칭거가 2년을 더 산 셈이다. 라칭거는 화려한 의례복을 선호했고, 상당한 실력의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렇다고 그가 대단한 ‘금수저 집안’은 아니었다. 경찰관 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안타깝게도 1941년 14세 때 나치 청소년 조식인 히틀러 유켄트에 가입했다. 이 경력이 훗날 그의 발목을 잡았으나 당시 강제 가입할 수 밖에 없던 시기여서 비판을 비켜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사촌 중에는 다운증후군 환자로 히틀러가 장애자를 징집해 학살할 때 희생당한 사람도 있었다.


    한스 큉은 스위스 루체른 인근의 구두방 집에서 태어났다. 조셉 라칭거와 한스 큉 두 사람 모두 전통적인 가톨릭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활동할 때만 해도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시작한 68혁명이 유럽을 휩쓸었을 때 그는 진보 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신학적 입장을 급선회했다. 진보적인 신학 교수들 조차도 학생들에게 마이크를 빼앗길 정도의 분위기에 그의 실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극렬 좌파운동은 유명해서 폴 틸리히로부터 박사 논문 지도를 받은 진보적 사회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도 수업 중 여학생으로 부터 안면에 모욕적인 침세례를 받은 적이 있을 정도 였다. 그때는 그랬다.


    라칭거는 “당시 나는 무신론적 열정에 사로잡힌 흉한 얼굴, 심리적 불안, 모든 도덕적 성찰을 부르주아의 썩은 냄새라고 내던져 버리는 열등의식, 이런 것들이 베일을 벗는 장면을 목도했다”고 말했다. 이 때부터 한스 큉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한스 큉이 꾸준히 튀빙겐 대학에서 연구에 전념했던 것과는 달리 라칭거는 행정을 병행했다. 불교로 치자면 한스 큉은 이판(理判), 라칭거는 사판(事判)이었던 셈이다 .


    한스 큉이 교황 무오설, 사제 독신 주의를 비판해 왔고 개방적인 신학 태도때문에  1979년 사제직은 유지하되 가톨릭 신학을 가르칠 자격을 박탈당한다. 자격 박탈을 주도한 사람이 라칭거였다. 그뿐 아니라 저서 출판 금지 등의 처벌도 내려졌다. 그로 인해 그의 책은 오히려 개신교권에서도 많이 읽히는 책이 되었다. 2003년에 한스 큉은 내한해 성공회 대학에서 강연했다.


    한스 큉이 '반항아 신학자', '가톨릭의 문제아'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라칭거는 철저한 가톨릭 모범생 이미지다. 반항아가 있으면 모범생도 있어야 하는 법 가톨릭의 이러한 대립이 부러울 때가 많다. 


    조셉 라칭거가 끊임없이 가톨릭 교회의 순수성을 방어하러 했다면 한스 큉은 가톨릭의 담장을 넘어 개신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했다.  조셉 라칭거는 교황 재직 때인 2009년 한스 큉을 접견한 적이 있다. 당시 교황청 발표에 따르면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이 환담했다."


    조셉 라칭거는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재직 중 해방신학을 비한하면서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을 제재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때 많은 해방신학자의 활동이 중지되거나 파문 조치가 내려졌다. 해방신학의 창시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신부도 이때 타격을 입었다. 구티에레즈는 현재 미국의 명문 노틀담 대학의 특임 교수로 있다. 구티에레즈도 1927년 생이다.


    가톨릭 전성기를 이끌던 3명의 유명 신학자 중 이제 구티에레즈만 남았다. 그들의 뒤를 이을 명망있는 신학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승에서는 대립했던 조셉 라칭거와 한스 큉, 부디 그곳에서는 화해하시라.


    김기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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