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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을 선택한 롯과 황궁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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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NEWS M| 작성일2024-05-03 | 조회조회수 : 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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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권의 책과 50편의 영화로 읽는 창세기)


    롯의 선택에는 풍요와 기만이 함께 있었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님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아직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창세기 13:8-10)


    아브라함(아브람)과 롯의 목자들이 양떼와 땅을 놓고 다투기 시작하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땅 선택권을 준다. 롯이 선택한 땅은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님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에덴과도 같은 이 땅을 선택한 롯의 이야기는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끝났고 롯이 사라진 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무대가 된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관대함과 롯의 욕심? 아니다. 이것은 공간과 장소의 차이다.


    지리학자 이-투 푸안은 ‘공간과 장소’(윤영호 김미선 옮김, 사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입니다.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됩니다. 공간과 장소의 개념은 각각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장소의 안전과 안정을 통해 공간의 개방성과 자유, 위협을 인식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공간을 〈움직임movement〉이 허용되는 곳으로 생각한다면, 장소는 〈정지pause〉가 일어나는 곳이 됩니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난다면 그 위치는 바로 장소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투 푸안은 ‘가치’를 중심으로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구분한다. 같은 개념이지만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축가들은 덴마크의 크론베르크성을 보고 돌들의 축조 방식에 경의를 표하지만 햄릿이 살았던 성이라는 사실에서 크로네르크성은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면서 단순한 공간이 특별한 장소로 변하게 된다.


    롯은 넓고 비옥한 땅을 보면서 두 장소의 공통적 의미를 발견했다. 주님의 동산과 이집트는 모두 풍요와 기만(欺瞞)이 있는 곳이다. 땅 분배가 있기 바로 전에 롯은 이집트에서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 동생으로 속였던 기만을 목격한 터였다. 롯은 이 두가지를 필요로 했다. 두 공간의 결정적 차이인 야훼와 태양신의 차이는 간과했기 때문에 그는 에덴과 이집트라는 상극의 두가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에 담을 수  있었다.


    이 –투 푸안은 공간은 움직이는 곳, 장소는 정지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롯은 이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않는 죽은 장소, 그래서 가치가 없는 곳으로 성서에 기록된다. 


    한국의 기형적인 부동산 과열 현상은 이  -투 푸안의 다음과 같은 말로 잘 설명된다.


    공간은 욕망을 투영하는 <권력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욕망의 수준은 확실히 사람의 <공간적 적정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 공간은 적절히 활용되면 부와 권력을 창출하는 <자원>이 됩니다. 공간은 전 세계적으로 <위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용됩니다. 중요 인물은 지위가 낮은 사람들보다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거나 더 많은 공간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공격적인 자아는 끊임없이 더 많은 활동 공간을 요구합니다.


    ‘역세권’의 위치성만을 강조하는 서민 아파트 촌은 아무런 장소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강건너를 향한 욕망이 가득한 죽은 공간이 되어 버린다. 그 사이 고급 아파트 촌에서 세습되는 고학력과 부는 그들의 권력이 되고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 채 ‘가격’과 자녀의 ‘대학 순위’의 가치가 고착된 장소로만 기능한다. 롯과 같은 죽음의 길을 가려는 이들을 탓하려고 대형 교회가 그곳으로 몰려든 것이 아니라 당신들은 롯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고 신분 세탁을 시켜주는게 그들의 '사역'이다. 


    교회가 이렇게 기만의 공모자가 되어 있을 때 영화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 2023년)는 롯과 같은 기준으로 '황궁 아파트'에 입주한 군상들을 다룬다. 갑자기 서울의 모든 것을 파괴한 대지진이 발생하고 이름부터가 상징적인 황궁 아파트만이 건재한다. 재앙 이후에도 황궁 아파트를 선택했던 그 논리가 여전히 작동하면서 이곳도 디스토피아로 전락한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황야’(허명행 감독, 2024년)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핀 오프(Spin- Off)같은 줄거리로 전개되는데 여기서는 황궁 아파트와 달리 강 이 편에서의 장소적 의미를 발견하려 애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훨씬 못 미치는 영화적 만듦새는 일단 차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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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콘그리트 유토피아에서 황궁 아파트를 장악한 이병헌이 아파트(장소)에서 폐허가 된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반면 아브라함과 그 직계후손은 끊임없이 공간이동을 하면서 새로운 장소를 멈춘 장소가 아닌 움직이는 공간으로 만들려 했다. 갈 곳을 알지 못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움직였던 그를 따라 후손들은 브엘세바로 벧엘로 엘벧엘로 옮겨 다니면서 장소에 가치를 부여했다. 안타깝게 그 긴 역사는 요셉에서 멈췄다. 그는 롯이 동경했던 이집트에 와서 그들의 방식 속에서 가치를 찾았다. 양극화와 궁극에는 자기 민족까지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공간에 대한 사회인문학적 이해’ (김은주 외,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총서 21)에서 김은주는 ‘들뢰즈의 생성의 시공간: 변이하는 공간, 생산하는 공간’이라는 제목으로 들뢰즈의 영토 개념과 공간을 설명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공간은 어떠한 구획도 없이 변화하는 생성 그 자체라는 점에서 카오스적이다. 이-투 푸안이 말한 것처럼 공간은 움직이는 곳이다. 영토(공간)는 특정한 환경이나 환경의 일정 부분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환경에 예속되지 않고 끊임없이 생성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라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영토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 공간 자체가 아니라 행위 즉 움직임이다.


    들뢰즈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개념을 빌어 설명하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행위는 특정 공간을 벗어나는 탈영토화는 잘 했다. 그러나 탈 영토한 곳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데 게을렀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선포된 그 공간과 영토의 의미를 재해석(재영토화)하는 데에까지 다다르지 못했던 것이다. 공간과 장소를 나누는 가치는 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공간과 영토, 장소 개념을 제대로 포착못한 21세기의 그 후손들은 애초 주어지지도 않았던 장소에 죽은 의미를 부여해가며 가자 지구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김기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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